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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작가' 최인훈 '하늘 광장'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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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작가' 최인훈 '하늘 광장'으로 떠났다

입력
2018.07.23 12:20
수정
2018.07.2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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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소설가가 2010년 김치수 문학평론가와 함께 ‘4ㆍ19의 현재적 의미’를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인훈 소설가가 2010년 김치수 문학평론가와 함께 ‘4ㆍ19의 현재적 의미’를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원한 광장의 작가, 최인훈 서울예술대학 명예교수가 분단 없는 세상으로 떠났다.

최 작가는 올 들어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그는 23일 오전 10시 46분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고 유족이 이날 전했다. 향년 84세.

최 작가는 분단시대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남한과 북한을 제 3의 눈으로 비판한 소설 ‘광장’(1960)을 썼다. 분단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시도였다. 최 작가는 분단 종식을 끝내 목격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최 작가는 1934년 두만강변 국경 도시인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다. 자수성가한 목재상 부부의 4남 2녀 중 맏이였다. 해방 후 들어선 공산 정권은 최 작가 집안을 부르주아지로 몰아 위협했다. 최 작가의 가족은 고향을 버리고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주했다. 원산 시절 풍경이 그의 소설 ‘회색인’과 ‘하늘의 다리’ ‘우상의 집’에 녹아 있다. 원산고등학교 재학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최 작가는 다시 한 번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1950년 12월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원산항에서 해군함정 LST를 타고 내려왔다. 부산 피란민 수용소에 잠시 머물다 인척이 있는 전남 목포에 정착했다. 영원한 실향민이자 유목민이라는 최 작가의 정체성은 시대가 만든 것이었다.

최 작가는 목포고를 졸업하고 1952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법학도 최인훈은 행복하지 않았다. 분단 한국의 현실을 고민하다, 마지막 학기 등록을 포기했다. 1957년 육군에 입대해 6년간 통역 장교로 복무했다. 끝내 제적된 그의 학력은 내내 ‘대학 중퇴’였다. 지난해 서울대 법학과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입학한지 65년 만이었다. 그는 당시 “기대하지 못했던 현실과 만났다”는 소감을 남겼다.

최 작가는 1959년 24세 군인 신분으로 소설가로 데뷔했다. 데뷔작은 ‘자유문학’에 투고한 단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이었다. 이듬해 월간지 ‘새벽’ 11월호에 문제작 ‘광장’을 발표했다. 대전 병기창에서 백지에 손으로 쓴 소설이다. 주인공 이명준은 분단 시대의 상징적 지식인으로, 남과 북에서 체제에 절망하고 사랑에 환멸을 겪는다. 포로로 남도 북도 아닌 제3국 인도 행을 택하고 배에 오르지만 이내 바다에 몸을 던진다. 밀실만 있고 광장은 없는 자본주의도, 광장은 있고 밀실은 없는 사회주의도 답이 아니라는 세계관으로 맺은 결말이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광장’ 중)

최 작가가 ‘광장’을 쓴 건 4∙19 혁명으로 자유와 진보의 공기가 흐르기 시작할 때였다.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최 작가는 당시 소설 서문에 그렇게 썼다. 2010년 1월 한국일보 인터뷰에선 “4∙19의 충격이 내 지적인 타성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광장’을 탄생시켰다. 여기엔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 월남한 피난민이라는 사실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고 했다.

‘광장’은 최 작가에게 ‘전후 최대의 작가’라는 이름을 안겼다. 그리고 한국문학을 영원히 바꾸었다. “한국문학의 모더니티가 대중이 확보한 자유의 공간에서 발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혁명공간의 시간이 짧았다고 하여도 덧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인훈을 포함해서 그 뒤의 수많은 한글세대 작가들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황석영 작가가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에 실은 평이다.

최 작가는 ‘광장’을 여덟 번이나 고집스럽게 고쳐 썼다. “4∙19 직후에 쓰인 것이기 때문에 역사에 무언가를 증언한다는 생각으로 숨가쁘게 썼다. 정신력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한 글자라도 좋은 모습으로 후대의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다”면서. 그 사이 내용, 형식이 바뀌었고, 분량도 늘어났다. ‘광장’은 개정판본이 9개나 존재하며, 1996년 통쇄 100쇄를 찍은, 한국현대소설사의 기록적 작품이다.

최 작가는 1977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냈다. 은퇴한 뒤에는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은둔한 문인으로 살았다. 소설 ‘회색인’ ‘서유기’ ‘화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웃음소리’ ‘총독의 소리’ 등과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산문집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 이데올로기’ ‘길에 관한 명상’ 등을 남겼다. 한국일보 희곡상, 박경리 문학상, 동인문학상, 서울시문학상, 이산문학상,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 서울극평가그룹상 등을 받았고, 1999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은 부인 원영희씨와 고전음악 평론가인 아들 윤구, 딸 윤경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에 마련됐고, 영결식은 25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강당에서 열린다. 장례는 문학인장으로 치러지며, 장례위원장은 김병익 문학평론가가 맡았다. 장지는 경기 고양시 자하연 일산 공원묘원이다. (02)2072-2020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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