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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위한 물음 ‘그럼 무엇이 정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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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위한 물음 ‘그럼 무엇이 정의입니까’

입력
2016.07.1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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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위하여

강남순 지음

동녘 발행ㆍ280쪽ㆍ1만4,000원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고 정치적 포부를 밝혔지만 강남순 교수는 "극소수의 용을 선망하고 양산하는 사회가 아니라 개천에서 살아가는 남녀노소가 '모두'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갖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경남도가 조선일보에 실었던 광고.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고 정치적 포부를 밝혔지만 강남순 교수는 "극소수의 용을 선망하고 양산하는 사회가 아니라 개천에서 살아가는 남녀노소가 '모두'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갖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경남도가 조선일보에 실었던 광고.

‘개천에서 용 난다’

차별을 낳는 구호는 아닐까

정의라고 믿어왔던 것들을

끊임없이 곱씹고 성찰해야…

“개천에서 용 난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다는 헬조선의 흙수저들에게 이보다 더 부러운 말이 있을까. 요행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그저 노력한 만큼이라도 얻어 갈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는 청춘들에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정치적 선언은 달콤하게만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강남순 교수는 감히 “개천에서 용 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개천’을 “전적으로 부정해야 하는 삶의 공간”이자 “하찮은 삶의 표상”으로 만들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다수 위에 군림하는 극소수”를 ‘용’으로 상징화함으로써 “사회적 지위에 따른 계층적 위계주의”를 강화하게 해서다.

강 교수가 한국일보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 40여 편을 엮어 만든 ‘정의를 위하여’는 정의에 대한 저자의 다층적 관심의 표현이자, 저자의 첫 ‘대화서’다. ‘대화서’란 학자의 처지에서 정의를 가르치거나 소개하기보다 동료 시민과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쓴 책이라는 뜻이다. 성별과 피부색, 장애 여부 등에 따라 차별적 권리를 누리는 것도, 구체적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차별하고 기계적인 균형만을 추구하는 것도, 법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누군가를 악마화하는 것도 저자에게는 정의가 아니다. 저자는 책에서 끊임없이 묻는다. 정의가 무엇인지, 당신의 정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당신의 정의는 정의로운지.

정의는 저항을 필요로 한다. “정의의 적용에서 배제”된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때 비로소 정의가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범위는 예리해진다. 그러나 반대편의 힘에 맞서는 모든 저항이 정의의 확장과 세분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해방적 저항’, 즉 “권력의 중심부 밖에서 자유와 평등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한 변혁을 모색”하는 저항이다. 이때 도덕적 성찰과 윤리적 판단이 개입된 ‘성찰적 분노’가 요구되며 이는 외부 위험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본능적 분노’나 증오나 복수심으로 전이된 ‘파괴적 분노’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강남순 교수는 인종, 국적, 성, 젠더, 장애 등 다양한 범주에서의 정의를 위해 인문학적 성찰의 일상화를 통한 비판적 저항의 필요성을 말한다. 이성애 중심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성애인가 동성애인가'가 아니라 그 관계가 '평등하고 평화적인가'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진은 지난달 1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7회 퀴어축제.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남순 교수는 인종, 국적, 성, 젠더, 장애 등 다양한 범주에서의 정의를 위해 인문학적 성찰의 일상화를 통한 비판적 저항의 필요성을 말한다. 이성애 중심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성애인가 동성애인가'가 아니라 그 관계가 '평등하고 평화적인가'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진은 지난달 1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7회 퀴어축제.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극복해 ‘페미니스트’라는 언어가 사라져버린 사회, 이성애인가 동성애인가를 따지기보다 그 관계가 평등하고 평화로운지를 묻는 사회, ‘덕담’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존재 그 자체가 기쁨이 되는 사회. 그러나 불행히도 정의는 스스로 오롯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따라서 건강한 사회도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그래서 “물음을 묻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되기를 주문한다. ‘왜’라는 질문은 “자명하다고 생각되는 것들”과 “현상 유지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늘 위협적이며 “인간을 동물과 다른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인문학 빼고는 다 있는 인문학 열풍 속에서 성찰적 분노나 해방적 저항은 고이 잠들었고 정의는 뭉툭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는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을 말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그런 답을 찾는 사람에게는 “근원적인 물음들과 마주하고 씨름하는 치열한 행위”로서의 인문학을 바라는 저자의 간절함이 담긴 이 책 자체가 작은 해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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