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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까맣게 잊고 있던 질문

입력
2017.11.16 15:0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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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은 서울의 달동네와 판자촌을 철거하기로 결정한다. 강제철거 과정은 폭력적이었고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하루아침에 생존의 터전을 잃게 된 주민들의 저항과 절규는 처절했다. 그때 상계동 주민들의 투쟁 현장에서 함께 싸우며 살았던 이가 예수회 소속의 미국인 존 빈센트 데일리 신부(1935∼2014)다. 철거민들과 함께 하늘을 지붕 삼아 한뎃잠을 잤던 이. 한국명 정일우. 공식적으로는 1998년에 귀화했지만 이미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인이었던 사람. 아니, 그 자신의 말에 기대면 끝내 ‘인간’이 되고자 했던 이. “죽기 전에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기도였다. 사실상 우리는 인간이 뭔지도 모르는데. 인간은 도저히 정의할 수 없는데.”

김동원 감독의 ‘내 친구 정일우’(2017)는 이방의 한국 땅에서 평생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살다 간 정일우 신부의 삶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다. 1986년 영화감독을 꿈꾸던 젊은이는 한 외국인 신부로부터 영상 촬영 요청을 받고 하루치 일로 상계동을 찾는다. 그 하루는 3년으로 연장되며 철거민들의 투쟁과 강제 이주 과정 전체를 기록하게 된다. 이 기록은 두 시간짜리 테이프 50개로 남았고, 그것을 편집한 영상이 한국 독립다큐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아 있는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1988)이다. “그때 제가 30년 뒤 정일우 신부의 일생을 다룬 다큐를 만들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다큐 속 내레이터 중 한 명으로 참여하고 있기도 한 김동원 감독의 말은 어떤 만남이 한 사람의 일생에 줄 수 있는 긴 파장을 감동적으로 요약한다.

25세의 나이에 한국에 건너와 예수회 재단의 서강대에서 철학 교수로, 사제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정일우 신부는 1973년 돌연 교수직을 버리고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간다. 제자들이 반유신독재 투쟁 과정에서 잡혀가면 시내 한복판에서 1인 시위를 하며 항의하고, 그 자신 경찰서에 끌려가는 고초를 치르기도 했던 이다. 제자들의 존경과 신망도 두터웠다. 한 제자는 말한다. “신부님은 발가락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게 온몸으로 듣는다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목격한 가난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던 듯하다. “나는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조금은 이상한 한국어 용법이기도 한데, 이 ‘비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 가는 길, 그게 이후 그의 삶이었던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 인상적인 것은 그가 그 삶 안에서 자유롭고 즐겁고 편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청계천 쪽방에서 사과궤짝 하나 놓고 살 때의 이야기다.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해요. 그냥 놀아요. 어슬렁거리며.”

그냥 말해버려도 될 것 같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는 가난 안에서 춤추고 술 마시고 논다. 그가 평생 따른 예수라는 모델도 이 사태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공동체는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한 용광로입니다.” 그가 동반자 제정구와 함께 만든 ‘복음자리’ 공동체 시절을 회고하며 어떤 이는 말한다. “온전히 행복한 기억만이 남아 있습니다. 다시 살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상계동에서 농성 텐트마저 침탈당했을 때 그의 강론은 이상한 역설에 도달한다. “더 가난해졌으니까 잘된 겁니다. 가난뱅이만이 희망입니다.” 감독은 아파트 숲으로 변한 상계동을 비추며 자문한다. “이제 가난은 더 무섭고, 더 부끄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공동체는 낯선 단어가 되었습니다.” 가난을 통해 인간으로 가려고 한 길, 그것이 정일우 신부의 삶이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질문이었다. 극장 밖에는 바람이 세찼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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