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김영민 칼럼] 그들은 올 것이다

입력
2015.11.01 10:05
0 0

가을은 깊었고 매미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어느 여름 일본의 중세 도시를 다녀왔다. 오전 회의 일정이 끝나면 오후에는 오래된 절이 남아 있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캐나다에서 온 정치학자 마크가 햇볕 아래 죽어 있는 매미를 발견하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짝짓기 위해 우는 매미들은 모두 수컷이다. 암컷은 발성기관이 없다. 어스름 지는 저녁이나 아침에 애타게 울다가 결국 짝을 찾는다. 그래서 태어난 매미의 유충은 10여 년 간 땅 속에 있다가 마침내 성충이 되어 지상으로 나와 열흘 남짓 살고 죽는다.

인간도 짝짓기를 한다. 발정한 인간은 인간의 방식으로 짝을 부르고 유충을 낳는다(고전 한문에 따르면 인간도 충(蟲)의 일종이다). 매미의 유충과는 달리 인간의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상당 시간 사회의 배려가 필요하다. 그것이 없었던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현재까지 약 20만 명의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냈다.

외국 병력에 의존하는 동안 자국 상비군이 제대로 발전하기 어렵듯, 해외 입양이 성행하는 동안 이 사회의 복지 제도는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 해외 입양에는 플뢰르 펠르랭이 프랑스 통상관광 국무장관이 되는 미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미혼모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한국이 후진국을 벗어났지만 세계화 시대의 선진국이 되는 데에는 실패함에 따라 독특한 유형의 미혼모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필리핀 여성과 한국인 남성 사이에 태어난 ‘코피노’ 가정은 이미 3만으로 불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의 친부 대다수가 20대다. 그들은 모두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아야 하는 수컷이다. 앞으로 영어를 잘하지 못하면 짝짓기에 어려움을 겪을지 몰라서였을까, 코피노의 친부 대다수는 값싸게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필리핀으로 갔다. 많은 이들이 한국이라는 경쟁 사회에 매달려 애타게 우는 대신 필리핀 현지의 여자들과 동거 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생기면 “쓰던 면도기가 고장 나 한국에 간다”며 아무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한국으로 떠나 버렸다. 필리핀 여성들은 최근까지도 이 사안을 달리 공론화할 발성기관이 없었기에 친자확인 소송과 양육비 소송을 통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때로 서울가정법원은 “아이는 A씨의 친자가 맞으며 A씨는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B씨에게 매월 양육비를 3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한다.

면도기는 다 수리했겠지만 코피노의 친부들은 필리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대신 서둘러 귀국하느라 충분히 익히지 못한 필리핀 영어를 무기로 생존경쟁에 나선다. 하나의 성충으로서 사회에 나와 밥벌이를 하고, 울며 짝짓기를 하고, 고령화 사회 속에서 살다가 죽어야 한다.

그들이 살아갈 사회는 이제 저출산이 고착화되어 해외로부터 노동력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회는 선진국의 고급 인력을 흡인할만한 일자리나 매력이 충분하지 않다. 해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곳은 대개 저임금 일자리이고, 따라서 후진국의 인력들이 유입된다. 말이 통해야 하므로 조선족처럼 한국어나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들이 선호된다. 이제 코피노들이 성장하면 자신들을 버린 아버지의 사회로 올 것이다. 한국인 아버지들이 버렸기에, 한국어 대신 영어를 말하며 세계화 되어가고 있는 아버지 나라의 일자리를 찾아 성큼성큼 올 것이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탄 공항버스에서는 어린 시절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성인이 되어 한국을 방문한 한 남자의 호소가 방송되고 있었다. 자신은 대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으며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신은 지금 캘리포니아의 한 대학에서 영시(英詩)를 가르치고 있으며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 온 이유는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을 만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 속에는 자신을 버린 부모나 친지에 대한 어떠한 “앵거”(anger)도 없고 다만 다시 만나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의 가슴에는 어떤 분노도 없다고 강조했다. 마치 그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