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등록 : 2018.06.14 04:40
수정 : 2018.06.14 08:26

천주교리 처음 듣고는 “놀랍기가 끝없는 은하수 같아”

<15> 천주교에 빨려 들어가는 다산 형제

등록 : 2018.06.14 04:40
수정 : 2018.06.14 08:26

큰 형수 제사 지내고 오는 길에

형수 동생 이벽이 천주학 강의

“대체 무슨 말?” 처음엔 황당 반응

호기심에 책 빌려 읽다 푹 빠져

아버지 따라 북경가던 이승훈에

이벽이 천주당 들러 책 구입 부탁

수학 공부위해 교회 찾은 이승훈

천주학에 훈도 조선 첫 영세 받아

중국에 남아있는 작자 미상의 마테오 리치(왼쪽)와 아담 샬 인물화. 조선 지식인들은 청나라에 들러 이들 서양인이 전해준 문물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접했다.

배 안에서 처음 들은 천주학 강의

다산은 22세 나던 1783년 성균관에 처음 입학했고, 큰아들이 태어났다. 그해 회현방으로 이사해 누산정사(樓山精舍)에서 살았다. 한 해 동안 여러 가지로 좋은 일이 많았다. 이듬해인 1784년 여름, 큰형수의 동생인 이벽의 도움으로 ‘중용강의’ 70조목을 지어 올려 임금의 극찬을 받았다.

이벽은 ‘중용강의’만 도와준 것이 아니라, 다산 형제들에게 서학(西學)을 심었던 사람이었다. 이에 앞서 큰형수가 어른들 병구완을 하다가 병이 옮아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1784년 4월 15일, 누이의 기제사에 참석했던 이벽은 다산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이벽은 정씨 형제들에게 천주학에 대해 강의했다. 팔당에서 미사리까지는 여울이 져서 쏟아져 내리는 물길이었다. 이벽의 강의는 그 물길처럼 도도해 거침이 없었다.

다산은 훗날 중형 정약전을 위해 쓴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서 이때 일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 형제는 이벽과 함께 한배를 타고 내려오다가 배 안에서 천지 조화의 시작과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해 들었다. 멍하니 놀라고 의심스럽기가 마치 은하수가 끝없는 것만 같았다.” 세상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이벽은 들뜬 상태로 신이 나서 천주교의 가르침을 펼쳤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다산의 첫 반응은 어땠을까? 다산의 표현대로라면 ‘멍하니 놀라고 의심스러웠다(惝怳驚疑)’였다. ‘창황(惝怳)’은 너무 놀란 나머지 정신이 멍해진 상태를 말한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어쩌자는 거야? 이것이 천주학에 대해 들은 다산의 첫 반응이었다.

끝도 없는 은하수

그러고 나서 다시 ‘마치 은하수가 끝없는 것만 같았다(若河漢之無極)’고 당시의 심리 상태를 설명했다. 이 대목을 ‘조선천주교회사’를 쓴 달레를 비롯해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천주교의 교리를 듣고 나서 은하수를 보는 것처럼 황홀한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해석했다. 그렇지 않다. 이 표현은 ‘장자(莊子)’의 ‘소요유’ 편에서 따온 것이다.

‘장자’의 해당 대목은 이렇다. “내가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接輿)의 말을 들었는데, 거창하기만 하고 합당한 구석이 없었다. 한없이 펼치기만 했지 돌아올 줄 몰랐다. 나는 그의 말이 놀랍고 두려워서 은하수가 끝이 없는 것만 같았다(吾聞言於接輿, 大而無當, 往而不返. 吾驚怖其言, 猶河漢而無極也.)”

하한무극(河漢無極)은 중국어 사전에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고 불경스러워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것을 비유하는 표현(比喻言論荒誕不經, 難以置信)’으로 나와 있다. 그러니까 이벽에게서 처음 천주교 교리를 들은 다산의 첫 반응은 ‘황홀’이 아닌 ‘황당’이었다. 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할까?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지?

이때 다산의 당황스러운 반응은 같은 날 쓴 시 ‘벗 이덕조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同友人李德操檗乘舟入京)’의 7,8구에서 “졸렬하여 맥락에 못 기댐을 깊이 알아, 남은 경전 붙들고서 옛 성현에 보답하리(深知拙劣絡無賴, 欲把殘經報昔賢)”라 한데서도 엿보인다. 놀라운 말을 들었지만 그냥 유가 성현의 글 공부나 계속 하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갑작스레 확 달라진 이벽의 확신에 찬 말과 행동에 호기심이 생긴 다산 형제는 상경 직후 이벽을 찾아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판토하(Pan-toja)의 ‘칠극(七克)’ 외에 샤바냑(Emericus de Chavagnac)이 쓴 천주교 교리서 ‘진도자증(眞道自證)’과 마이야(De Mailla)가 정리한 가톨릭 성인전 ‘성년광익(聖年廣益)’ 등을 빌려 읽었던 듯하다.

판토하가 쓴 '칠극'. 정민 교수 제공

형제는 그제서야 앞서 느낀 황당함을 지우고 “비로소 기쁘게 마음이 기울어 그리로 향하였다.(始欣然傾嚮.)” 황당함은 어느새 다시 황홀함으로 바뀌었다. 멍하니 몽롱하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이후 형제는 강력한 은하계의 블랙홀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갔다.

“북경에 가거든 천주당을 찾아가게.”

이벽은 전부터 혼자 남몰래 천주학 관련 책을 찾아 읽고 있었다. 이벽은 서학이 더없이 궁금했지만 혼자 하는 공부로는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벽은 성호 이익의 조카였던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의 문인이었다. 이벽이 1776년 10월 15일에 스승 이병휴의 영전에 올린 친필 제문이 남아 있다. 이병휴는 양명학에 기운 성호 좌파에 속한 학자였다. 권철신 권일신 형제가 그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벽이 쓴 스승 이병휴를 위한 제문.

1783년 겨울, 가깝게 지내던 벗 이승훈은 아버지 이동욱을 수행하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을 향해 출발했다. 부친은 서장관의 직분을 맡고 있었다. 이벽은 다산의 자형이기도 한 이승훈을 찾아갔다.

“내 긴히 이를 말이 있네. 북경에 가거든 천주당을 꼭 들러 주게. 거기에 서양에서 온 선교사가 있을 걸세. 가서 그를 만나 신경(信經) 한 부를 달라고 청하고, 영세도 달라고 하게. 그러면 신부가 틀림없이 자네를 아껴 기이한 물건을 듬뿍 줄 걸세. 그저 돌아오면 절대로 안 되네.”

황사영의 백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까지 이승훈은 천주학을 잘 몰랐다. 그는 서양의 기이한 물건을 많이 받아 올 수 있다는 이벽의 말에 홀연 호기심이 동했다.

“조선 사신의 아들이 수학을 배우려고 찾아왔었습니다”

한편 당시 북경 교구장으로 있던 포르투갈 출신의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가 1790년 10월 6일에 바티칸의 안토넬리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여기에 당시 이승훈의 행적이 보인다.

“1784년에 조선 왕국에서 온 사신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이 수학을 너무도 배우고 싶은 마음에서 북경 교회를 찾아왔었습니다. 그리고는 수학을 가르치는 유럽인 선교사에게 수학의 원리에 대해서도 듣고 수학 책들도 얻어 갔습니다. 그런데 유럽인 선교사들은 이 조선 사람에게 수학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기회를 봐서 가끔씩 그리스도교의 원리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도 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을 건네주기도 하는 등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은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으며, 마침내 세례를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사신으로 온 아버지의 승낙과 동의를 받은 다음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윤민구 역주ㆍ’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ㆍ가톨릭출판사ㆍ2000년ㆍ44쪽)

이승훈 초상. 원래 그는 수학을 배워 볼 생각으로 중국의 천주당을 찾았다가 천주교에 입교한다.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이 편지에 따르면 당시 이승훈은 수학 공부를 위해 천주당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천주학에 훈도되어 마침내 자청해서 세례를 받기까지 했다. 애초에 그는 서양서를 구해 와서, 당시로서는 첨단의 학문인 서학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볼 생각이 컸다.

어쨌거나 이승훈은 서학보다는 수학에 더 관심이 있었고, 이후 신부와의 대화 과정에서 천주교에 깊이 이끌려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았다. 그가 받은 본명은 베드로였다. 조선 교회가 그의 반석 아래 서리라는 바람을 담은 이름이었다. 당시 신부들과의 대화는 필담으로 진행되었다. 그의 영세는 대부분의 신부들이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반대하는 중에, 유일하게 그라몽(De Grammont) 신부의 지지를 받아 성사되었다. 이승훈은 그라몽 신부가 주는 교리책과 상본(像本) 등 각종 성물을 듬뿍 받아 조선으로 돌아왔다.

제 죄를 고백합니다

1996년 윤민구 신부는 로마 바티칸 교황청 포교성 고문서고에서 이승훈이 1789년 말, 1790년 7월 11일에 북경 성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 두 통을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한문 원본은 사라지고,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불어로 번역되어 공증을 거친 것이었다.

이승훈이 1784년 영세를 받고 귀국한 이후, 조선 천주교회 창립을 위한 노력의 경과를 보고하고, 그간 자신의 무지로 인해 교회법을 어긴 사실들을 적시한 후, 죄의 용서를 청한 내용이었다. 첫 번째는 영세 받을 당시 교리 지식이 부족했는데, 그래도 영세가 유효한가, 아니면 다시 받아야 하는가. 두 번째는 자신이 수학을 공부하려는 욕망 때문에 성교회에 입교했는데 이것이 문제 되지는 않는가. 세 번째는 북경에서 받은 천주상과 성물들을 국경 검색을 피하기 위해 외교인(外敎人)에게 맡겼다가 돌려받았으니, 이것이 혹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

어찌 보면 꽤 유치한 수준의 대죄(待罪)였는데, 이제 막 열성적으로 신앙에 불타오르던 그로서는 어쩌면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교리서를 전해 받은 이벽은 그 길로 외딴집을 구해 그곳에 처박혀서 골똘히 교리 학습에 돌입했고, 1784년 4월부터는 앞서 다산 형제들에게 배 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광적인 열정에 휩싸여 포교 행동에 돌입하였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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