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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취향의 공동체

입력
2017.07.1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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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도 많은 팬을 거느린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를 주장한다. 그는 국가와 개인 사이에 있었던 ‘중간 수준의 공동체’들이 현대에 이르러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무너졌다고 본다. 거칠게 풀어보자면 이윤과 개인이 강조되면서 거리와 마을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그런데 ‘좋은 삶’의 어떤 측면은 좋은 마을에서, 좋은 이웃과 함께 좋은 일을 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지역공동체를 부활시키고 사회적 연대를 복원해야 한다고 샌델 교수는 역설한다.

국가와 개인은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거리와 마을은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있는 문제 같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로 진화했는데, 그 ‘사회’라는 것은 수십만 년 동안 대개 크기가 몇백 명 수준이었다. 어쩌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부족적 동물’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욕망, 친밀한 관계에 대한 욕구,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은 마음, 그럼으로써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갈망은 모두 우리의 깊은 본능이다. 그리고 그런 욕망의 대상이 되는 ‘의미 있는 타인’의 수는 기껏해야 수천 명이다. 도시만 해도 너무 거대하다. 국가나 민족 같은 집단은 기실 우리 머리 속에서 상상의 공동체로서만 작동한다.

앞서 얘기한대로 ‘좋은 마을’은 현대사회에서 거의 실종 상태다. 특히 급격한 도시화를 겪은 한국의 상황은 한 마디로 처참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속감과 인정투쟁의 대상이 되는 수백수천 명 규모의 집단에 대한 열망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일종의 ‘유사(類似)-마을’들이 생겨나 지역공동체의 대체재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여러 종교단체와 신자 모임이 그 역할을 많이 떠맡았다. 각종 사조직과 기수 모임, 동창회, 향우회, 전우회, 산악회, 학부모 모임도 얼추 비슷한 역할을 했다.

이들 단체는 이런저런 한계도 있었다. 특히 ‘인연’을 기반으로 한 조직의 경우 외부에 배타적인 경우가 많았고, 종종 공동선보다는 그들만의 이익을 좇곤 했다. ‘우리 대학 출신 대통령 한번 내보자’ 따위의. 이런 조직들은 내부 분위기도 별로 민주적이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회가 복잡해지고 개인주의가 더 퍼지면서 이제는 그런 단체들마저도 몰락하는 중이다. 그리고 최근 한 세대 사이에 새로운 유형의 유사-마을이 우후죽순으로 생겨 그 공백을 메우고 있지 않나, 나는 생각한다. 바로 ‘취향의 공동체’들이다. 각종 인터넷 게시판과 카페,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물리적(또는 전자적) 기반으로 삼는.

일단 이 공동체들은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이 훨씬 싸다. 정기적으로 회관이나 식당을 빌리지 않아도 되고, 총무도 필요 없거나 부담이 덜하다. 또 이들 취향 공동체들은 대부분 분위기가 권위주의적이지 않고 구성원들이 수평적으로 대화한다.

무엇보다 취향이 거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가 태어난 도시나 졸업한 고등학교보다는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가 자신의 본질을 더 잘 설명한다고 여긴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과의 관계, 또 그 관계가 이뤄지는 공간에 깊은 애착심을 품는다.

‘덕후’(오타쿠) 문화가 점점 커지는 것을 거꾸로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물론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취미에 몰두하고, 정보를 얻기 위해 취향 공동체를 만들어 이용한다’는 분석이 상당 부분 옳으리라. 그러나 취향 공동체 안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 취미에 깊이 빠져드는 사람 역시 많은 듯하다. 그 내부에서는 얼마나 취미에 몰두하느냐가 지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므로. 취향 공동체 안의 언어들이 종종 과하게 호들갑스러운 것도 그 때문 아닐까.

취향 공동체들이 샌델이 말한 중간 수준의 공동체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상당히 기대를 거는 편이다. 기존의 ‘연고(緣故) 공동체’에 비해 개방성과 확장성이 높고, 공동선에 대한 감각도 나아 보인다. 착한 기업, 협동조합, 도시마을 등의 다른 중간 공동체 복원 프로젝트들도 나름대로 의미 있지만 모든 사람이 참여하기는 무리다.

그러나 취향 공동체들이 아직 미숙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규모가 작은 취향 공동체들은 종종 사당화(私黨化)하기 일쑤다(‘친목질’이라는 용어로 불리는). 구성원들의 충성심이 너무 강하고 전체적으로 자기객관화 능력이 떨어지면 사이비종교처럼 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취향 공동체들조차 외부 세계와 소통에 서툴다. 이것은 사회적 연대에 치명적이다. 다른 취향 공동체들과 잘 연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반(反)권위주의 연합’ 수준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대외활동 방식은 소비자운동과 소수자운동, 연예인 팬클럽에서 많은 부분을 빌려왔는데, 장점도 있지만 한계도 있다.

취향 공동체들이 새로운 위상에 걸맞은 새로운 자기규정, 새로운 자기통제력, 새로운 대화법을 발명해주길 바란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거리와 마을이 됐으면 좋겠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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