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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경찰이 강남역 살인자를 정신병자라 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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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경찰이 강남역 살인자를 정신병자라 한 이유

입력
2016.05.2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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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강남역 인근 노래방 건물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됐다. 이 사건을 놓고 ‘여성혐오 범죄냐, 아니냐?’로 논란이 분분하던 23일, 강신명 경찰청장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경찰청장은 이번 사건을 ‘정신질환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로 기정사실화 했다. 경찰청장의 결론은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행동과학팀(범죄행동분석팀)이 19일과 20일, 피의자 김아무개(34)씨와 행했던 두 차례의 심리면담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성급하고 이례적인 데다가 앞으로의 재판에 커다란 혼란마저 안기게 될 경찰청장의 발표가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으로 촉발된 여성혐오 논란을 잠재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찰청장이 ‘이번 범죄의 성격은 이런 겁니다’라고 유권 해석을 내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다. 그런 것은 경찰청이나 범죄행동분석 어느 쪽의 고유 업무도 아니다. 브라이언 이니스의 ‘프로파일링’(휴먼&북스,2005)은 범죄행동분석의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 “미확인 범죄자의 특정한 행동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성별이나 외모, 나이 교육 정도, 사회적인 위치 그리고 기타 요인을 밝혀낼 수 있고, 따라서 수사의 범위를 한층 좁힐 수 있다.” 로이 헤이즐우드와 스티븐 G. 미초드가 함께 쓴 ‘프로파일러 노트’(마티,2007) 또한 범죄행동분석은 사건 해결을 위한 유력한 가능성이 모두 제외된 “미해결 범죄”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까닭은 범죄행동분석이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이기 때문이고, 현장 수사관들이 거기에 의지하면 할수록 그보다 중요한 ‘객관적 증거’를 소홀히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강남 살인사건 피의자 김모씨가 지난 24일 서울 강남역 인근 노래방 화장실에서 범행 현장검증하고 밖으로 나서고 있는 모습. 배우한기자 bwh3140@hankookilbo.com
강남 살인사건 피의자 김모씨가 지난 24일 서울 강남역 인근 노래방 화장실에서 범행 현장검증하고 밖으로 나서고 있는 모습. 배우한기자 bwh3140@hankookilbo.com

범인이 잡혔다고 해서 경찰이 범죄행동분석을 멈추어야 할 이유는 물론 없다. 분석된 자료는 동종의 범죄를 예방하고 수사하는 데 이용될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를 공표하는 일에는 극히 신중해야 한다. 현행법에는 범행 당시 사물을 변별하고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모자란 심신미약 상태인 경우 형을 감경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규정이 있다(형법 제10조 1항, 2항. 민법 제12조, 제9조). 성범죄를 비롯한 여러 범법자들이 취중이었다는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데는 근거가 없지 않은 것이다.

보통 경찰과 검찰은 범죄자가 죄에 상응하는 강력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한다. 그런데 경찰청장이 범죄행동분석까지 내밀며 이번 사건은 정실질환자가 저지른 것이라고 했으니, 변호사 노릇을 대신 한 셈이다. 이제 피의자는 경찰청이 보증한 정신질환 판정이라는 든든한 방패로 법원과 검찰의 창을 막을 수 있다. 경찰청장이 이런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능력 없는 정부나 부처가 사회의 난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영감님들이나 중년 아저씨들이 좌석에 앉아 있는 여자 승객에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다고 고함을 치는 것은 지하철의 진풍경이다. 여자보다 남자의 팔다리가 더 튼튼할 텐데 굳이 여자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떼쓰는 남성의 심리는 캐보지 않아도 안다. 여성에게는 타고난 보살핌의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서 평생 거기에 기대 살아온 것이 남성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사람도 많지만, 이 문제는 그보다 간단히 생각해야 한다. 여중생이나 여고생이 아니라 남자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에게 그러다가는 처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은 이 동물적인 본능을 떠나 설명할 방법이 없다. ‘프로파일러 노트’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한 대목이 여성혐오가 생겨나는 기제를 짚어 준다.

“오늘날에는 여성을 향한 분노가 예전보다 훨씬 많이 드러난다. 직장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아주 뒤늦었지만, 여성이 동등하게 대우받게 된 것에 대한 반발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켜 여성이 성범죄자에 대한 형사 고발이나 민사 소송을 더 쉽게 제기할 수 있도록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법안이 통과되면 여성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에 반발하여 성폭력을 통해서만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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