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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살아남은 사람의 권리 혹은 의무

입력
2016.07.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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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몰라. 그저 유대인이라는 사실만 알지. 그거면 충분해.”

방에는 총상 입은 20대 나치 친위대 장교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죽기 직전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자기 침상 앞으로 불려온 유대인 포로에게 다짜고짜 지금껏 저지른 악행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에 처넣은 일, 마을에 불을 지르고 창문으로 도망치는 어른과 아이들에게 무차별 총질을 해댄 일….

삶의 마지막 순간, 나치 장교는 걷잡을 수 없는 죄의식과 두려움에 휩싸였으리라. 저승에 가서 맞닥뜨릴 심판대에서 자신의 숱한 죄목들이 생짜 그대로 까발려지는 상황만은 어떻게든 면하고 싶었으리라. 다급해진 그는 아무나, 눈에 띄는 유대인을 자기 앞으로 데려오게 했다. 자신이 겨눈 총구에 다치거나 죽어 나간 숱한 피해자의 대리인이 되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침 근처에서 노역하던 청년 사이먼 비젠탈이 그 자리에 불려갔다. 장교는 자기 앞에 서있는 포로의 이름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다.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다고 했다. 그저 유대인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러니 어서 자신에게 면죄를 선언해달라고 청했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비젠탈은 장교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 방을 나와버렸다.

잘한 일일까. 용서를 구하는 나치 장교의 눈빛은 간절했다. 하지만 비젠탈 자신이 나치에 의해 죽어간 수많은 동포를 대리할 자격이 있는가. 게다가 생의 마지막에서 사면을 청하는 순간까지 그 장교는 사이먼 비젠탈이라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무화시켰다. 나치가 지닌 유대인에 대한 태도를 외설적으로 드러내고 말았다.

종전 후 아우슈비츠에서 극적으로 생환한 비젠탈은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이 경험을 글로 썼다. 그리고 서른여섯 명의 유명인사에게 보내 자문을 구했다. 그들의 의견을 모아 ‘해바라기’(뜨인돌 2005)이라는 책으로 묶었다. 이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제목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수백만 유대인의 유해가 공동묘지에 쓸쓸하게 묻혀버린 반면 가해자로서 사면을 구걸했던 나치 장교는 해바라기가 피어나는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상황을 그대로 지켜봐야만 할까.

오스트리아 국적 유대인으로 건축설계설계사 일을 하던 사이먼 비젠탈은 이 모멸적인 상황을 직접 바로잡기로 결심한다. 세계 곳곳으로 숨어버린 나치 전범들, 그들을 돕거나 방조한 개인과 단체를 추적해 정의의 심판대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게 ‘최후의 나치 사냥꾼’으로 알려진 비젠탈은 아르헨티나에 은신하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잡아 법정에 세운 것을 비롯, 2005년 숨지기 전까지 세계 곳곳을 누비며 1,000명이 넘는 나치 전범을 색출해냈다.

함께 끌려간 수용소에서 가족과 친척 대부분을 잃은 비젠탈은 살아생전 말했다. “나의 활동은 절대 개인적인 보복이나 원한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정의 구현을 위한 일이다.” 유대 사회는 비젠탈의 이 언급에 전적으로 호응했고, 정부 재계 시민사회가 합쳐 물심양면으로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전범국가 독일이 양심적인 행보를 거듭하고 일등국가로 거듭나는 데는 이 유대인들이 무시 못 할 조력자로 활동한 셈이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집요하게 나치 전범을 쫓고 있는 비젠탈의 후계자들은 한국 언론을 만날 때마다 의아해한다. 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이토록 생생한데 한국 정부는 가해자들이 사과 한마디 없이 뻔뻔한 역사 왜곡을 일삼도록 방조하느냐고. 껄끄러운 문제라고 해서 대충 덮고 봉합하려는 행위는 역사에 대한 또 다른 죄라고. 그런데 지난해 말 요령부득의 합의를 도출한 우리 정부가 올해 편성했던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지원예산을 전액 삭감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암담하다. 자존감의 문제인가, 역사인식의 부재인가. 뭐가 잘못된 걸까.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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