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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침묵의 목적

입력
2017.06.1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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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일 수밖에 없는 날씨였다. 아무리 심술궂은 신이라도 이런 햇빛과 이런 바람, 이런 하늘을 펼쳐 놓고, 사람들에게 일하러 나가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 날씨 탓에 너무 긍정적이 되어 버렸나? 그럼에도 나는 혼자였다. 친구도 가족도 없이, 좋은 것은 날씨뿐. 14층 옥탑 방 창문을 열고, 빛으로 씻어낸 듯 선명해진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어디선가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고, 바람이 불어 왔으며, 창가에 매달아 놓은 대나무 풍경이 나지막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햇빛, 음 하나하나에 방점을 찍으며 종소리는 울려 퍼지고, 바람, 대나무 조각들은 가볍게 부딪히고, 그리고 고요. 이 모든 것의 배경인 고요. 불현듯 나는 깨달았다. 혼자가 아니었다면, 이 아름다움은 나에게 오지 않았으리라. 아쉬운 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아보려고 애쓰다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의미를 알아들으려 노력하지 말고, 사람들의 말소리를 종소리처럼, 바람소리처럼 들어볼까?

산 설고 물 설은 타국에서 한 달여를 머무르고 있으나, 낯선 이들의 언어는 날이 갈수록 나를 의기소침하게 했다. 넘을 수 없는 성벽은 높아만 갔고 건널 수 없는 해자는 깊어만 갔다. 호기심도 도전의식도 꺾이고, 머물고 있는 숙소는 또 하릴없이 편해서, 날이 갈수록 문밖으로 나갈 일이 막막했다. 그런데 그날 나는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냥 눈을 감고 듣기만 해보자. 그러면 의미에 가려져 있던 무엇이 들릴지도 모르지. ‘영리한 말 한스’가 되어 보는 거야.

백여 년 전 독일에는 사람 말을 알아듣고 날짜 계산까지 할 수 있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영리한 말 한스는 발굽으로 땅을 두드려 사람들이 낸 문제의 답을 알아맞히곤 했다. 학자들은 의심을 품고 실험을 거듭했고, 그 결과, 한스가 정말로 사람 말을 알아듣거나 숫자 계산을 하는 게 아님을 밝혀냈다. 한스는 질문하는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 몸의 긴장 상태 같은 것을 감지해 반응했을 뿐이라는 것. 믿거나 말거나 소동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동네 카페로 들어가 구석자리에 앉는다. 젊은 어머니와 초등학생 아들이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먹고 있다. 서너 명의 중년 사내들이 모여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백포도주 한 잔을 앞에 놓고 홀로 앉아 있는 할머니도 눈에 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나는 눈을 감는다. 귀를 기울인다. 무엇이든 감지해보려 애쓴다. 신경이 쫑긋 곤두선다. 나를 향해 의아한 눈길들이 쏟아지는 것 같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젓는다. ‘영리한 말 한스’ 같은 건 잊어버리자. 의미를 알아들으려는 노력도, 단서를 감지하려는 노력도, 모두 그만 두자. 재미없다. 굳이 정답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주위가 소란해진다. 맥주를 마시고 있던 아저씨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서빙을 하던 웨이트리스가 손님 바지에 맥주를 쏟았나 보다. 연신 미안해하는 웨이트리스를 향해 아저씨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엎질러진 맥주를 분주히 닦다가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내며 웃음을 터뜨린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는다. 카페 안은 금세 시큼한 맥주 냄새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다시 새처럼 지저귀기 시작한다. 나도 홀로 중얼거린다. 말이란 게 뭔데? 유창한 우리말로 내가 내뱉은 말들은 고작 변명이거나 해명 아니면 핑계였다. 허세와 험담과 인사치레였다. 새삼 코를 벌름거리며 맥주 냄새를 맡는다. 말을 안 하고 있으니 이렇게 좋다. 네가 좋아한다고 말해서 나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고, 네가 싫어한다고 말해서 나도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도리 없이 침묵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좋음. 이제 그만 중얼거리고 갓 구운 빵처럼 신선한 맥주 냄새나 실컷 맡아야겠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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