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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내친구]<7> 얀 린드스텐 전 스웨덴 왕립과학학술원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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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내친구]<7> 얀 린드스텐 전 스웨덴 왕립과학학술원 총재

입력
2018.05.11 19: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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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린드스텐 전 스웨덴 왕립과학학술원 총재
얀 린드스텐 전 스웨덴 왕립과학학술원 총재

스웨덴 왕립과학학술원은 물리, 화학 및 경제 분야 노벨상 선정위원을 임명하는 기관이며 노벨상 이외 스웨덴에서 수상하는 다른 상의 선정위원도 임명한다. 2005년 저녁 만찬을 계기로 교유해온 스웨덴 왕립과학학술원의 전 총재 얀 린드스텐(Jan E. Lindsten) 박사를 소개하려고 한다.

2005년초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미과학재단’(Korea-US Science Cooperation Center) 이사로 활동 중이었다. 연락의 요점은 한국과학재단에서 스웨덴 스톡홀름에 재단 사무소를 개설하게 됐는데, 그 기념으로 한국 및 스웨덴 과학자의 공동 심포지엄 개최를 주선할 수 있는지 검토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스웨덴 왕립공과대학교에는 오랜 친구인 폴크 스니카스(Folke Snickars) 박사가 부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심포지엄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으며 2005년 9월22-24일 왕립공과 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심포지엄 주제는 ‘실시간 연결되는 IT시대의 교통 기술’이었다. 한국 과학자들의 논문 8편을 포함해 총 17편의 학술 논문이 발표되어 많은 참석자들의 호응을 받으며 성대히 마치게 되었다.

심포지엄 다음날 한국과학재단 스웨덴 사무소 개설 기념 및 대한민국ㆍ스웨덴 심포지엄 개최 기념 만찬이 노벨 박물관에서 개최됐다. 린드스텐 박사와의 첫 만남은 만찬 석상에서 이뤄졌다. 그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게 되었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의 전공은 노벨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노벨상 선정 위원을 임명하는 기관의 수장과 함께 같은 식탁에서 만찬을 하게 된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또 만찬 석상에서 축사를 한 린드스텐 박사 다음으로 내가 만찬 축사를 하게 되어 더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축사 후 린드스텐 박사와 담소를 나누면서 노벨상 수상자 선정 과정을 자세히 듣게 됐다. 우선 놀란 것은 분야별로 수천 명 후보군 중에서 압축하여 최종 수상자를 선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물론 노벨상 상금만큼의 비용이 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 천명 후보자를 어떻게 정하는가에 대한 나의 질문에 당시(2005년) 기준으로 각 분야의 논문 피인용 회수 1,000개 이상 과학자를 우선 후보로 정한다는 답을 듣게 되었다. 또 한국 과학자 중 1,00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을 발표한 인물의 프로파일을 미리 스웨덴 왕립과학학술원으로 보내주면 많은 도움이 되겠다는 조언도 듣게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왜 평화상 만은 스웨덴 왕립과학학술원에서 주관하지 않고, 노르웨이 국회에서 선정 위원을 임명하는지도 자세히 설명하던 린드스텐 박사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만찬 후 린드스텐 박사와 저녁을 같이 했다는 자랑 겸 노벨상 후보 선정 과정을 알리기 위해 프린스턴 대학에서 같이 수학한 당시 정운찬 서울대 총장에게 전화했다. 정 총장의 첫 반응은 “갑자기 왠 농담이냐”는 쪽이었다. 스웨덴 왕립과학학술원 총재와 저녁을 같이 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피인용 회수 1,000회 이상 과학자들이 서울대에만 10여명 있을 뿐 아니라 5,000회 이상의 과학자도 2명이 있다고 알려줬다. 린드스텐 박사와의 대화 중 알게 된 사실, 즉 1,000회 이상 인용된 인물의 프로파일을 스웨덴 왕립 과학 학술원에 미리 보내면 도움이 된다는 조언도 전하였다. 아마 지금은 인터넷을 통한 논문 접속 방식의 급속한 발전으로 피 인용 회수 1만회 이상은 돼야 후보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1935년 출생인 린드스텐 박사는 1967년 의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200여편 논문을 발표한 세포 유전학 권위자로서 1970-1990년 노벨 의학상 선정 위원으로 활약했다. 2003년부터 2006년 퇴직까지 스웨덴 왕립 과학 학술원 총재를 역임했다. 또 2004년에는 한국 과학 기술 한림원 외국인 회원으로 선정되어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이다.

일본에 26명의 노벨 수상자, 대만까지 합쳐 중국에 총 9명의 수상자가 나왔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평화상 이외에는 왜 아무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을까. 노벨상 수상자 배출된다고 해서 그 나라 과학 수준이 순식간에 높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었다면 그 국가의 기초과학 수준을 증명함과 동시에 그만큼 인류 공영에 이바지 했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 자문해 본다.

서강대 이덕환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 나라에서 노벨 과학 수상자가 없다는 것이 “우리 과학자들이 무능하거나 사회적으로 주어진 책무를 소홀히 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중략) 오늘날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화려하게 활약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모두 기술 개발을 통한 경제 성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략) 비록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기초 과학에 관심을 갖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교수 지적에 공감하면서 2011년 설립된 기초과학 연구원(IBS)의 발전과 성과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다만 과학 및 공학 기술의 개발에는 절대로 정치가 개입되어서는 안되며 정치가 개입하는 한 과학 기술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겠다. 정치는 가시적ㆍ단기적 결과만을 요구하므로 거시적이며 눈에 보이지 안는 기초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김창호ㆍ재미 과학자(일리노이대 명예석좌 교수)

김창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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