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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축적이 가능한 사회

입력
2018.08.08 18:26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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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정보는 축적됐을 때 힘이 배가된다. 반복된 경험과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진 무형의 자산은 쉽게 흔들리지 않고 종종 훨씬 큰 규모의 상대를 제압하기도 한다. 저력이 있다는 칭찬은 그 안에 탄탄히 축적된 시간의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축적 과정에서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관리하고 선택하는 작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다.

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만들어 내는 사람이 필요하다. 만드는 작업은 힘들고 시간이 걸린다. 제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치기도 하고 작은 기업, 조직 하나라도 제자리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자식 키우듯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키워 낸 결과물도 자칫 한순간 사라지기 일쑤다. 무언가를 일궈 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기회의 땅이자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기도 하다.

관리나 통제는 만드는 것보다 덜 고달플 수도 있고, 규제 권한은 권력과 닿아 있어 더 선호되기도 한다. 과거 경제성장의 초기 단계에서는 국가가 사회를 끌어간다는 주도 개념이 있었지만, 산업과 사회가 고도화할수록 관리ㆍ통제 기능도 더 정교한 방식을 필요로 한다.

축적에 있어 또 하나 긴요한 과정은 선택이다. 버리고 없애는 것은 새 것을 만드는 것에 비해 더 쉽고 빠른 시간에 가능하고, 소리없이 진행되기도 하지만 눈에 띄게 할 수도 있다. 잘 수행된 선택과 삭제는 새로운 생산의 원천이 되지만, 반대로 애써 일궈 놓은 자산을 날려 버릴 수도 있다. 잘 선택하는 능력은 만드는 능력만큼이나 중요하다.

정치에 있어 공통적으로 정권이 바뀌면 컴퓨터를 리셋하듯 과거 시스템을 지우기 마련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을 좋아하는 화끈한 국민성도 단절을 통한 새 출발을 선호하고 기대한다. 축적된 악화와 폐해는 당연히 지워 가야 한다. 부당하게 축적된 부의 재분배도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교육제도나 경제, 외교정책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많은 예산과 시간을 들여 만들어 온 인력과 자산들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리셋 과정에서 잘 백업돼 있는지, 혹시 필요한 것을 지우고 불필요한 것을 남겨 놓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종종 인간 관계나 조직 차원에서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전체를 뒤집어 놓는 경우가 있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가장 힘 빠지는 갑질이다.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창조와 생산의 힘은 더 위축되고, 그 관계는 결국 쇠락하게 된다. 노련한 외과 의사가 수술하듯 버릴 부분을 잘 도려내고 나머지 기관들을 잘 보존하는 것이 축적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축적이 가능한 사회는 하나의 시스템에서 다음 시스템으로 연결되는 접점이 존재할 때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접점은 다른 의견에 대한 경청과 포용을 의미한다. 사회와 경제가 성장하려면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모두 필요하고, 상반되는 것은 종종 보완적이기도 하다. 협치는 사람 한두 명 섞는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상당수 구성원들이 인식을 공유하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 형성됐을 때 발현한다. 아쉽게도 학교나 사회에서 우리는 그런 개념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정치도 합당한 롤 모델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정치와 사회의 변혁기에 우리가 그동안 축적해 온 것 중에서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지 면밀하게 되물어보아야 한다. 가용 자원이 많지 않은 나라가 글로벌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지식과 경험의 축적을 극대화할 수밖에 없다. 만드는 사람들은 점점 지쳐 가고, 관리와 통제를 담당하는 제한된 공공 부문에는 지원자들이 몰리고, 버리고 없애는 작업은 손쉽게 리셋 버튼을 누르는 상황은 오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구태여 거창한 철학적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 축적된 시간의 힘은 단기간에 보완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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