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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되갚아 줄 거야!”

입력
2017.11.26 14:2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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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 주 목요일, 아침 최저기온은 평년보다 1~4도가량 낮았고 지역에 따라 눈발이 날리는 곳도 있었다. 그날 내가 접한 SNS에는 수능 도시락 메뉴나 아이를 들여 보내고 찍은 시험장 교문 사진이 많이 올라왔다. 사진으로 보는 수능시험장은 하늘마저 새파랗게 추웠다.

조금 감상적인 마음이 되어 아득하게 느껴지는 나의 대입시험을 검색해 봤다. 1983년도에 입학한 대학 신입생들은 1982년 12월 2일 목요일에 대학입학학력고사를 쳤다. 아침 8시 40분까지 고사장 입실, 9시에 시험이 시작됐고 오후 4시 50분에 4교시의 시험이 모두 끝났다. 입시 한파 없는 포근한 영상의 날씨였는데도, 낯선 학교 낯선 아이들 틈에 앉아 시험을 보려니 온몸이 떨리도록 추웠다.

시험을 끝내고 어둑어둑한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루 열 다섯 시간을 60명이 빽빽한 교실에 유배 당했던 고3의 1년이 하루의 시험으로 모두 증발해 버린 듯한 허전함도 밀려왔다. 과연 내 인생은 어디로 가야 하나, 누가 정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사랑의 쓴 맛 한 번 본 적 없고 세상 험한 꼴 한 번 본 적 없는 보들보들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교복 아닌 사복을 입고는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던 야들야들한 마음이 막막해졌다. 그 때 나는 시험문제의 답을 맞추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열 아홉이었다.

요즘 수험생들의 일상을 현실감 있게 보여주는 광고가 있다. 3년 전 전파를 탄 어학원 광고인데 까칠한 수험생과 그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부모와 선생님이 등장한다.

S.E) (새벽 6시, 알람 소리)삐비비빅 삐비비빅!

엄마) (조심스럽게 딸을 깨운다)다영아, 일어나자. 학교 가야지.

다영) (이불을 끌어당기고 돌아눕는다)조금만 더…

엄마) 빨리 일어나야지 응? 늦어, 얼른 씻고 가야지.

다영O.V) 되갚아 줄 거야.

다영) (가방을 매고 뛰어가며)깨워달라고 했잖아.

엄마) (주스를 들고 따라 나가며)이거라도 먹고 가, 이거라도.

다영) (현관문을 쾅 닫는다)안 먹어!

다영O.V) 엄마도,

선생님) (졸고 있는 다영의 머리를 한 대 때리며) 잠이 와? 응? 지금 잠이 오냐고?

(어깨를 두드리며)잘하자, 응?

다영O.V) 선생님도,

아빠) (한밤중 차 안에서 머뭇거리며 묻는다)공부는 잘 되냐?

다영) (창 밖을 보며)아 몰라.

아빠) 힘든 건 없고?

다영) (성의 없는 대답)없어.

다영O.V) 아빠도… 되갚아 줄 거야...

고3이라는 이유로 내가 받은 사랑, 응원, 지지.

우리가 받은 만큼 똑같이 보답해 드리자!

(파고다교육그룹_영상광고_수능캠페인_2014_카피)

영상의 앞 부분에서는 공부에 찌들어 뾰족하게 날이 선 아이가 시험이 끝나면 ‘되갚아 주겠다’고 복수(?)를 다짐한다. 내 자식들도 저랬을 것 같다. 하지만 광고는 마지막 10초에서 수험생활 동안 받은 사랑에 똑같이 보답하자는 반전으로 끝을 맺는다. 너무 뻔한 효녀 심청 얘기라서 식상한 감도 있지만, 사심 가득한 엄마인 나는 내 아이들도 그랬으면 은근히 바란다.

광고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내 속마음은 수능을 끝낸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것보다 먼저 수능 때문에 스스로의 청춘에게 져야 했던 빚을 되갚았으면 좋겠다. 좁은 교실, 불편한 의자에 숨겨 두었던 ‘웃기’나 ‘움직이기’를 되찾아 왔으면 좋겠다. 포기했던 ‘나가 놀기’나 ‘아무 것도 안하기’도 해봤으면 좋겠다. 자의 반 타의 반 배제되었던 ‘설거지’나 ‘쓰레기 분리수거’에도 동참했으면 한다. 고3이나 수험생이 아닌 그냥 ‘열 아홉 살’로 사는 자유를 스스로에게 되갚았으면 좋겠다.

(파고다교육그룹_영상광고_수능캠페인_2014_스토리보드)http://pan.best/Wg8IO9Am

(파고다교육그룹_영상광고_수능캠페인_2014_판도라TV링크)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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