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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인간 증서

입력
2017.07.1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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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주춤해지는 해질녘이면 산책에 나선다. 주로 마을을 에워싼 농로를 스적스적 걷는데, 벼가 무성하게 자라는 논배미 옆의 농로를 걷다 보면 논둑 가에 자라는 뽕나무들이 자주 눈에 띈다. 칠월의 뽕나무 잎들은 두껍고 짙푸른 광택을 뽐낸다. 본래 뽕나무 잎은 잠엽(蠶葉)이라 하여 누에를 기르는 데 쓴다. 어릴 적 시골에서는 생계를 위해 집집마다 누에를 길렀다. 지금 논밭 가에 자라는 뽕나무는 대부분 그 시절에 심은 것이다.

뽕나무를 보면 애틋한 추억이 떠오른다. 농업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누에 기르는 걸 가르키는 ‘양잠’이란 과목을 들었다. 뽕나무를 키우는 실습지에서 직접 뽕잎을 따다가 잠실에서 자라는 누에에게 먹였다. 햇빛이 쨍쨍한 날도, 구죽죽 비가 내리는 날도 뽕잎을 땄다. 그렇게 뽕잎을 따면서 나무 그늘에 숨어들어 뽕도 따고 님도 보는 되바라진 애들도 있었다.

뽕을 따는 건 무척 지겨웠지만, 누에가 쑥쑥 자라 고치를 짓는 과정을 보는 건 기쁨이었다. 어린 뽕잎을 뜯어다 잘게 썰어 뿌려놓으면 개미누에가 뽕잎에 올라 붙는데, 그러면 깃비로 살살 쓸어 누에채반에 옮겨 놓았다. 이 개미누에는 채반에서 약 4주일 동안 뽕을 먹고, 똥을 싸고, 잠을 자고… 그렇게 넉 잠을 자고나 허물을 벗고 몸이 투명해지면 섶에 올라가 입으로 명주실을 토해 고치를 짓기 시작했다.

어느 날 당번인 나는 잠실에 머물며 누에가 고치를 짓는 광경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양잠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고치 짓는 광경을 보고 있던 나에게 말씀하셨다.

“뽕잎만 먹고 비단실을 토해내는 모습이 참 놀랍지? 너도 이 누에처럼 비단실을 토해내는 인생을 살려무나!”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오며 양잠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곱씹어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비단실을 토해내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사실 그때까지 난 비단옷이나 비단이불도 구경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가난했다. 하지만 단지 가난을 모면하고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보다 숭고한 가치를 지닌 삶이 무엇일까를 궁구하게 되었다. 양잠 선생님이 던진 말씀이 내 인생의 소중한 화두가 되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과연 내가 산 인생이 비단실을 토해낸 그것이었는지, 아니면 무명실이나 토해낸 것이었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무위도식하며 끝없이 오래 살려고 하는 생존의 욕망, 무엇이든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소유욕에서는 자유로워지고 싶은 갈망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 니체가 말한 바 존재의 대의를 잃어버린 말종 인간은 면하려 해왔다고.

올 여름에 나는 무더위를 견딜 방편으로 작가들이 쓴 기행문들을 모아 읽고 있다. 며칠 전에는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국 기행>을 읽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소속 칼리지의 주요 목표는 학식이나 지식을 두뇌에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곳 졸업생은 의사나 변호사, 신학자, 물리학자, 운동선수 같은 전문가가 되어 나가지 않는다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온 젊은이들이 이 칼리지에 2, 3년을 머무르며 조화로운 삶을 배우는데, 육체, 정신, 심리가 고루 단련된 완벽한 인간이 유일한 목표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졸업식 때 받는 것은 전공 분야에 대한 증서가 아니라 ‘인간 증서’라고.

그 칼리지들이 지금도 그런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교육의 모범 사례는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뛰어난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대학들이 적폐의 온상처럼 여겨지는 시절이 아닌가. 양잠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생의 나침반으로 삼고 살아온 나는 내 인생을 졸업하게 될 때 과연 ‘인간 증서’를 받을 수 있으려나.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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