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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물건들

입력
2017.02.1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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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고속도로 휴게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인형 뽑는 기계가 놓여 있었다. 투명한 통 밑바닥에 인형들이 겹겹이 깔려 있고, 버튼을 눌러 조종하면 아래위 양 옆으로 움직이는 갈고리가 매달려 있는 기계. 나는 좀 난데없다는 생각을 하며 인형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엎어져 있거나 널브러져 있는 노랑, 분홍, 파랑 봉제 인형들은 대체로 동그란 눈에 펑퍼짐한 코를 지녔다. 입은 대부분 달려 있지 않지만, 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입 꼬리를 끌어 올린 채 영혼 없이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일 밤 늦은 시각이라 휴게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특유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불이 꺼져 있는 구역도 있었다.

그때 소풍이라도 갔다 온 것처럼 들떠 보이는 두 사람이 나타났다. 부스럭거리며 지폐 한 장을 기계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어느 인형을 뽑을 것인지 갈고리를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지 의논하면서, 깔깔거리기도 하고 짧은 탄성을 내지르기도 하면서, 한 동안 기계에 매달려 있었다. 인형을 잡거나 떨어뜨릴 때마다 나도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았다. 마침내 두 사람의 환호성과 함께 인형 하나가 출구로 굴러 나왔다. 커피를 다 마신 구경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인형 기계 근처 탁자 위에 곰인지 토끼인지 혹은 고양이인지 알 수 없는 분홍색 물건이 놓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아까 기계에서 뽑혀 나온 인형이 틀림없었다. 왜 두고 갔을까? 화장실 가는 길에 웃음 섞인 말소리를 얼핏 들었던 것도 같다. 너무 못 생겼어... 짝퉁이잖아... 그래도 함께 애쓰며 즐거워하던 시간의 흔적인데 설마 두고 갔을까. 혹시 잃어버린 건 아닐까? 손을 뻗어 인형을 만져보려다 그만 두었다. 가져갈 생각도 없는 사람의 손을 타봤자 인형으로서는 두 번 버림받는 꼴이다. 걸어가다가 인형 뽑는 기계를 돌아보았다. 투명한 벽 너머 환한 불빛 아래 앉아 있고 고꾸라져 있는 인형들. 세상에는 물건들이 너무 많다.

그날 방문했던 집에서 본 물건이 떠올랐다. 집 주인의 어머니가 쓰던 낡은 반닫이였는데, 장식이 거의 없고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소박한 물건이었다. 집 주인은 자기가 어렸을 때 반닫이에 자꾸 낙서를 해서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곤 했는데, 낙서를 지운 흔적이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 있어서 이따금 만져보기도 하고 들여다보기도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잠시 어지러웠다. 먼 옛날 누군가가 어떤 물건에 남긴 흔적이, 그 속에 영혼처럼 스며든 이야기가, 겹겹이 쌓인 시간의 결이 해일처럼 내게 밀어 닥쳤다. “저 속에는 우리 집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만 넣어두었지요. 어머니께 소중한 것, 나에게 소중한 것. 그런 것들만 저 속에 들어갈 자격이 있어요.” 왜 아니겠는가. 물건에도 자격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것이 사람과 다른 생물 사이에, 사람과 물건 사이에도 오고 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과 물건 또한 나와 시간을 나누고 있으니까.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나를 세상 속에 있게 하는 것들이니까. 오래 사용했던 물건, 소중히 여겼던 물건이 낡고 망가져도 버리기 힘든 것은 그 속에 내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한낱 물건이라고 해서 함부로 만들어서 소유하고, 함부로 내버릴 일이 아니다. 나를 품은 채 버려진 물건들이 어디로 가서 무엇이 될 것인지 생각해 본다면.

커다란 양팔 저울의 한쪽 끝에 내 삶을 올려놓고, 반대편에는 내 손을 거쳐 갔고, 거쳐 갈 물건들을 쌓아놓는다고 상상해 본다. 아. 물건들이 너무 많다. 저울이 기울어 자꾸 미끄러지고 무너져 내린다. 쓰레기 더미 속에 묻혀버린 균형을, 대칭을, 존중을 되찾고 싶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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