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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사는 집을 짓는 사람, 책 편집디자이너 박상일

입력
2018.05.26 10:0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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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판사 ‘수류산방’ 방장 맡아

문학동네 시인선 디자인 전담

달력처럼 위로 넘겨 보는 파격 시도

“시의 형태에 책을 맞췄다” 평가

#2

디테일 챙기다 치아까지 무너져

“책 만들기는 몸이 하는 일”

책장이들의 책장이, 박상일 수류산방 방장. 홍인기 기자
책장이들의 책장이, 박상일 수류산방 방장. 홍인기 기자

요 근래 치과에 다니는 건 이가 온통 내려 앉아서라고 했다. 지나치게 일해 지나치게 피로가 쌓인 몸의 아우성이다. 출판사 수류산방을 이끄는 박상일(56) 방장 얘기다. 그는 ‘책장이들의 책장이’다. 책뿐일까. 뭐든 멋들어지게 만드는 일에 미쳐 있다.

박 방장은 실은 스태프라 부르는 게 미안한 거물이다. 시집 시리즈 ‘문학동네 시인선’에 외주 스태프로 참여한다는 구실을 달아 인터뷰를 청했다. 문화예술계 스태프, 한국말로는 제작진의 치열하고도 고독한 세계를 보여 주기에 딱인 사람이어서다. 그는 흔쾌히 응했다. 밑단을 몇 번 접어 올린 바지에 커다란 별무늬 스니커즈를 신은 옷차림만큼이나 ‘괜히 잡는 무게’와 거리가 먼 사람인 듯했다.

우선 문학동네 시인선 이야기부터. 2011년부터 박 방장이 디자인한다. 문학동네는 문학 전문 대형 출판사다. 소설로 컸다. 시집은 조금 늦됐다. 편집자로 시인선을 맡아 키운 김민정 시인의 전언. “시로는 후발 주자니까 뭔가 바꿔 보자고 했다. 문학동네에 디자이너가 스무 명쯤 있었는데도 안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시가, 시집이 정말로 어려운 거구나 싶었다. 결국 수류산방에 찾아갔다. 진짜 예술하는 곳이니까.”

시집 표지부터 글자체까지, 모든 걸 박 방장에게 맡겼다. 큰 출판사로선 자존심 상하는 모험이었지만, 수류산방의 이름은 그만큼 절대적인 것이었다. 박 방장의 문학 안목도 믿었다. 그는 시를 아낀다. 한양대 건축학과 재학 시절 신춘문예 시 부문에 거푸 도전한 문학 청년이었다. 매번 떨어지긴 했지만. 서울 종로구 팔판동 작은 건물 2층에 세 든 수류산방엔 제목만 훑어봐도 어지러운 낡은 문학평론서가 한가득이다. “요즘은 잘 안 읽는다(웃음). 문학평론가인 김인환 고려대 명예교수님 책 말고는. 세상 사람 모두가 그분 글을 읽어야 한다. 그러면 좋은 세상 될 거다.”

문학동네 시인선의 두 번째 시집으로 나온 허수경 시인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2011). 왼쪽이 가로로 눕혀 보게 큰 시집이고, 오른쪽이 익숙한 모양으로 만든 작은 시집이다. 수류산방 제공
문학동네 시인선의 두 번째 시집으로 나온 허수경 시인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2011). 왼쪽이 가로로 눕혀 보게 큰 시집이고, 오른쪽이 익숙한 모양으로 만든 작은 시집이다. 수류산방 제공

박 방장은 달력처럼 가로로 눕혀 책장을 위로 넘기는 시집을 ‘발명’했다. 파격이었다. 행, 연이 갈리는 부분을 표시하는 작은 선도 넣었다. 쪽과 쪽을 경계로 바뀌는 게 행인지, 연인지에 극도로 민감해하는 시인과 독자를 위한 배려였다. “문학동네 시인선은 시의 형태에 책을 맞췄다. 시를 위한 책 같고, 시를 위한 집 같다.”(이우성 시인∙ ‘세상에 이런 책! 수류산방 11년의 모험’에서) 크기는 46배판(188X257㎜)으로 키웠다. 표지 앞뒤를 펼치면 커다란 포스터가 됐다.

문학동네는 “옆으로 넘기는 작은 시집도 같이 내는 게 안전하겠다”고 했다. 10권까지는 큰 시집과 작은 시집을 같이 냈다. 비용 문제로 작은 시집만 살아남았다. 시집 디자인만으로 수집 욕구를, 시심을 있는 대로 자극하는 지금의 그 시인선이다. ‘문학동네시인선 105 이사라 시/집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이달 8일 나온 105번째 시집 표지엔 그렇게 딱 두 줄이 적혀 있다. 표지 색과 글자의 색, 그리고 두 가지 색의 어울림이 모든 걸 말한다. 커다랗고 깊은 여백이 더 많은 걸 말한다. 박 방장의 자기 표현은 뒤쪽 표지의 작은 그림으로 한다. 점, 부호, 도표, 사진까지, 그림이 매번 바뀐다. 속지 글씨는 SM세명조체를 쓴다. 꼿꼿하고 정제된 느낌이지만, 가독성은 떨어지는 어려운 글씨체다. 시집을 이렇게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면 밀고 오지 못했을 디자인이다.

문학동네 시인선
문학동네 시인선

시집 디자인 과정은 이렇다. “제목 다는 단계까지 마친 시집의 PDF 파일을 문학동네에서 보내 온다. 시를 읽는다. 시인에 대한 선입견 없이 시만 읽으려 애쓴다. 마음을 비운다. 기다린다. ‘접신’의 순간이 ‘탁!’하고 온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무수한 색의 조합을 시도한다. 시안 몇 개를 결정한다.” 초기 20권까지는 모든 시를 정독했다고 한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져 힘들었다. 요즘은 스마트폰에 파일을 담아 휙휙 넘겨 본다. 멀리 떨어져 시를 보기 위해서다.

박 방장은 임현정, 곽은영, 장옥관 시집이 맘에 든다고 했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실패작”이라고 했다. 10만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인데, 의외였다. “박 시인 누나가 세상 뜬 지 얼마 안 됐을 때 디자인했다. 누나 뒷모습을 담아 달라는 요구에 얽매이는 바람에 표지와 그림이 따로 논다.” 완벽주의자답다. 박 방장은 “문학동네 시인선이 나를 단련시켰다”고 했다. 그는 2015년 동아시아 4개국이 주최하는 아시아출판문화상 출판미술상을 받았다. 한국인이 받은 건 처음이었다.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박 방장을 수상자로 결정했다. “그것도 시인선 디자인이 널리 알려진 덕분이다.”

다시 박 방장의 치아 이야기. 이가 무너지다니, 얼마나 지독하게 일했기에. 2003년 수류산방 창업부터 함께한 동지 심세중 실장의 하소연. “방장님은 마감이 다가오면 집중력 떨어진다면서 음식을 끊는다. 끝내고 먹겠다고는 하는데, 일을 끝내지 않는다. 디테일까지 일일이 챙기느라 그렇다. 하기로 한 건 무조건 해야 하는 사람이다. 틀린 결정이라도 일단 끝까지 해 보자고 한다. 예컨대 사진마다 캡션을 넣기로 하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넣어야 한다. 촬영 연도를 찾기 어려운 사진이 있으면, 그래도 찾아내라고 한다.” 심 실장의 한숨. “단계별로 깨 나가는 전자오락이 있다고 치자. 1단계에서 60점만 맞으면 2단계로 넘어간다. 방장님은 60점밖에 못 따는 걸 못 견딘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려도 완전정복을 해야 다음으로 넘어간다. 직원들이 죽어 난다. 책 만드는 보람은 있는데 기쁨은 없다(웃음). 경제적 문제도 있고.” 다시 깊은 한숨.

박상일 방장이 “제대로 만들고 싶어서” 만든 윌리엄 켄트리지 도록 ‘해찰: 언저리의 미학∙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 수류산방 제공
박상일 방장이 “제대로 만들고 싶어서” 만든 윌리엄 켄트리지 도록 ‘해찰: 언저리의 미학∙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 수류산방 제공

박 방장은 책 만드는 사람들의 해결사다. 너무 어려운 프로젝트, 너무 빠듯한 예산, 너무 급한 마감을 맞닥뜨린 사람들이 찾는다. 수류산방은 외주 영업을 하지 않는다.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든다. 그리고 이따금 찾아오는 이의 고민을 풀어 준다. 그것도 저렴하게. “하다 보면 밑지는 장사를 하게 된다(웃음). 일감을 놓고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는 건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맡은 일과 경쟁한다.”

박 방장과 클라이언트의 의견이 부딪히면 어떻게 할까. 박 방장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될 거라면 꼭 우리가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 이상한 책 한 권 더 나오는 데 기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대충’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성에 찰 때까지 책을 만지느라 마감을 몇 달씩 어기기도 한다. “책 만드는 건 몸이 하는 일이다. 온몸이 밀고 나가야 한다. 노가다(막노동)이기도 하고, 도를 닦는 일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가 2010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맞춰 낸 ‘김윤옥의 한식 이야기’에 얽힌 일화. 청와대가 책을 제작해 달라고 찾아왔다. 책을 만드는 동안 집요하게 간섭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영부인 김윤옥 여사를 띄우는 책을 만들라는 거였다. 박 방장은 청와대 말을 듣지 않았다. “X팔리는 책을 내기 싫어서 그랬다. 20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나가는 책 아닌가. 다른 곳에서 만들면 청와대 입맛에 맞춘 뻔한 책이 나올 게 뻔했다. 그걸 막으려고 맡았다. 70%쯤은 방어했다. 사실 돈을 제대로 못 받았다(웃음). 받아야 할 액수의 절반쯤 받은 것 같다.”

박상일 방장은 잊혀져서 안타까운 것들을 붙잡아 책에 담는다. 사진은 '박수근 총서'. 수류산방 제공
박상일 방장은 잊혀져서 안타까운 것들을 붙잡아 책에 담는다. 사진은 '박수근 총서'. 수류산방 제공

박 방장의 아버지는 건축가였다. 그래서 대학 전공을 건축으로 골랐지만, 즐겁지 않았다. 사람이 살 만한 집을 만드는 공부가 아니라는 게 싫었다. 시를 쓰고, 대학신문사에 다니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졸업 후엔 잡지를 만들었다. 대한항공 기내지 ‘모닝캄’, 옛 선경그룹(SK)이 발행한 대학생 잡지 ‘지성과 패기’ 등을 만들며 기획, 제작, 편집, 디자인을 통째로 고민하는 ‘에디토리얼 디자인’에 눈떴다.

2003년 책장이 4명이 수류산방을 만들었다. 나무 ‘수(樹)’에 흐를 ‘류(流)’, 나무가 흐르는 산방(山房)이라는 이름은 ‘글과 사진, 아날로그와 디지털, 공간과 평면, 편집과 디자인, 새것과 옛것이 이름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 만나 풍성한 삶의 숲을 이룬다’는 뜻이다. 딱딱한 나무가 물처럼 흐를 수 없듯,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걸 만들기로 작정한 회사다. ‘20세기 건축의 모험’을 시작으로 명작으로 꼽히는 ‘예술사 구술 총서’, ‘새로 보는 박수근: 박수근 100장면’, ‘해찰: 언저리의 미학∙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 등 미술, 건축, 음악, 공예, 문학, 문화재 관련 책을 주로 냈다. 지금 직원은 박 방장, 심 실장까지 6명이다. 그렇게 애쓰고도 회사는 커지지 않았다. “내가 팍팍한 사람인 데다, 일이 너무 고돼서 사람이 자꾸 떠나는 것 같다. 요즘 들어 일의 양을 조절하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된다(웃음).”

백두산 고지도 달력. 수류산방 제공
백두산 고지도 달력. 수류산방 제공

‘예술사 구술 총서’에 이어 최근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자서전’까지, 박 방장은 잊히는 것들을 책에 담는다. 얼마 전엔 음반제작사로 등록했다. 1930년대 노래를 부르는 가수이자 연극배우 ‘풍각쟁이’ 최은진씨의 음반을 만들기 위해서다.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 잘 나서지 않는 분들의 일과 생을 정리해 남겨 드리고 싶다. 그분들이 이 우주를 지탱하는 힘이다. 세상의 중심이 아닌 ‘언저리의 미학’이랄까.”

좋은 책의 정의를 물었다. “그런 걸 따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는 사람이 좋은 책이 좋은 책이다. 다양한 것들이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 다양한 가능성의 하나를 시험하는 곳이 수류산방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야말로 ‘피, 땀, 눈물’로 만든 책을 몇 권 선물받았다. 책을 골라주는 그의 얼굴이 자부심으로 활짝 폈다. 존재 증명으로 책을 만드는 사람, 박상일이다.

■스태프의 물건

수류산방엔 ‘방장 방’이 없다. 사무실 기둥 옆 좁은 한구석이 박 방장의 공간이다. 책상, 의자에 매킨토시 컴퓨터 한 대가 전부다. ‘S’ 자판을 그의 컴퓨터 키보드에서 찾으려면 한참 헤매야 한다. ‘S’ 자판이 깨진 탓이다. 박 방장은 “‘S’를 하도 많이 눌러서 깨졌다”고 했다. 왜 하필 ‘S’를?

박 방장은 모든 크리에이티브 작업을 컴퓨터로 한다. 머리속 아이디어를 컴퓨터 모니터로 불러 내 들여다보면서 질문하고 고민하고 답을 찾고 다시 질문한다. 그사이 습관적으로, 혹은 강박적으로 ‘Command’와 ‘S’ 자판을 누른다. ‘Comman+S’는 저장 단축키다. 자판을 동시에 누르면 작업 중인 파일을 드라이브에 저장한다. “저장 자판을 그렇게 많이 누른다는 걸 나는 몰랐다. ‘다다다닥’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고 직원들이 항의해서 알았다(웃음). 몇 분 동안 누를 때도 있다고 한다. 고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S’ 자판의 수난은 박 방장이 그만큼 무섭게 집중한다는 증거다.

박 방장은 책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괴짜 예술가’로 통한다. ‘예술창작집단’을 내걸고 수류산방을 만들었다. 수류산방의 역사를 정리한 ‘세상에 이런 책! 수류산방 11년의 모험’(2014)에서 이원 시인은 “수류산방의 책과 디자인은 전위이며 클래식이다. 수류산방은 정신을 높이, 멀리, 깊이 던지는 곳이다. 우리는 그곳의 책과 디자인을 인문 정신의 전위적 표현이라 부르고 싶다”고 썼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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