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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티 킴 푹(Phan Thi Kim Phuc)

입력
2017.06.0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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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6.8

1972년 6월 8일 촬영된 저 사진으로 베트남 9세 소녀 판 티 킴 푹의 운명이 달라졌다. 자료사진
1972년 6월 8일 촬영된 저 사진으로 베트남 9세 소녀 판 티 킴 푹의 운명이 달라졌다. 자료사진

베트남 트랑방(Trang Bang)의 9세 소녀 판 티 킴 푹(Phan Thi Kim Phuc, 1963~)이 베트남군의 네이팜탄 오폭에 화상을 입고 내닫는, 1972년 6월 8일의 AP사진은 베트남전쟁의 참상을 폭로하며 반전 여론을 확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날 폭격으로 킴 푹의 사촌 등 4명이 숨졌고, 킴 푹은 등을 포함 몸의 30%에 3도 화상을 입었다. 21세 AP 사진기자 닉 우트(Nick Ut, 본명 후잉 콩 우트)는 저 장면을 촬영한 뒤 사진 전송보다 먼저 킴 푹과 부상자를 차에 싣고 사이공의 한 병원으로 후송했다. 누드 사진은 서비스할 수 없다는 AP 뉴스의 보도원칙 때문에 사장될 수도 있었을 그의 사진은, 논란 끝에 소녀를 클로즈업하지는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세상에 나왔고, 12일자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수많은 언론에 보도됐다.

전쟁 부상병으로 넘쳐나던 그 시기, 킴 푹은 무려 17차례 수술을 받으며 화상에서 회복돼 14개월 만에 퇴원했다. 그가 그런 집중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온 세상이 그를, 우트의 사진을 통해 알게 된 덕이었다. 미국과 베트남은 어떻게든 그를 살려야 했다.

네이팜탄의 점액질 인화물질 화상은 일반 화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와 흉터를 남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킴 푹은 화상 후유증으로 만성적인 통증과 함께 왼팔을 거의 쓰지 못했고, 왼손으로는 핸드백을 드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전후 베트남의 한 대학서 의학을 전공하던 킴 푹은 베트남 공산정부의 반미 선전 도구로 불려 다니느라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86년 당국의 허가로 쿠바로 유학을 갔다가 92년 현지에서 결혼해 신혼여행 길에 캐나다로 망명했다.

그는 94년 유엔 유네스코 친선대사가 됐다. 96년 캐나다 시민권을 얻었고, 이듬해 미국서 ‘킴 푹 재단’을 설립한 뒤부터는 전쟁 청소년 의료구호활동을 벌이며 대학과 교회 강연 등을 해왔다. 그는 그 삶을 시작하며, 자신처럼 다친 이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자 했던 꿈을 접었고, 기독교로 개종한 뒤 화해와 용서, 자신을 구원한 세상의 선의에 대해 책과 방송 등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는 의대 졸업장 대신 여러 대학들의 다양한 명예 학위를 받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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