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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통상임금 문제의 본질

입력
2017.09.1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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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41부는 기아자동차 근로자들이 제기한 초과근로수당 청구 사건에서 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보아 원고들에게 약 4,223억 원의 추가 임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리고 이 소송이 사측에게 예상치 못한 재정 부담을 지우는 것으로서 신의칙에 반한다는 회사의 항변은 기각했다. 법원은 회사 이익잉여금 보유액의 증가 및 부채 비율의 감소 추세, 2010년대부터 매년 5천억 이상의 경영성과급이 지급되어 온 점 등 여러 사정을 꼼꼼하게 따져 신의칙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적절한 판단이다.

기실 신의칙 적용 법리는 그 자체가 엉성하다. 2013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대법원은 노사가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한다고 합의한 경우, 통상임금 소송으로 인해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이 발생한다면 그 소송은 정의와 형평에 비춰 신의칙에 반한다는 법리를 만들었다. ‘만들었다’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근로기준법과 같은 노동법 스스로가 신의칙의 이념인 ‘사회적 형평’ 에 기초한 법제이므로 그 효력을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신의칙을 이용해서는 안 되는데도, 통상임금 소송에서 대법원이 이를 무리하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형평에 근거한 법률의 적용을 법관이 형평을 이유로 막은 것과 같은데, 우리나라와 같은 성문법 국가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점 때문에 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이인복, 이상훈, 김신 대법관은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의칙으로 그 강행규정성을 배척하는 다수의견의 논리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당혹감마저 든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회사가 상여금이 통상임금에서 빠진다고 신뢰한 점이 신의칙 적용 법리를 정당화시킨다고 보기도 어렵다. 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 가능성은 이미 1996년 대법원 판결에서 나타났다. 노동법 연구자들도 1990년대 후반부터 그 가능성을 논문 등을 통해 밝혔다. 따라서 기아자동차와 같은 대기업이 이런 판례 법리를 몰랐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고, 정말 몰랐다 하더라도 회사에게 과실이 있다.

이 점에서 요즈음 재계의 대응은 당혹스럽다. 재계는 신의칙 항변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수조 원의 손해가 발생한다고 법원을 압박하고, 기아자동차 1심 판결이 선고되자 기업의 해외 이전, 경쟁력 약화 등이 우려된다는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삼성전자가 미국법을 오해하여 특허권 침해로 수천억 원을 넘는 손해배상액을 물게 되었을 때, 재계는 이를 변호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아자동차와 같은 대기업이 자국의 노동법을 몰랐다는 것에 대해선 왜 이렇게 당당하게 나서는 걸까? 만약 이런 상반된 반응이 외국 기업의 지적재산권에 비해 한국 근로자의 노동권은 보호 가치가 낮다는 뜻이라면,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지금 통상임금 논쟁의 더 큰 문제는 관련 논의가 본질을 벗어난 채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통상임금이‘근로시간’제도와 관련된 사안인데도, 재계와 노동계, 대기업 노사 모두 이를 ‘임금’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기업은 주 40시간의 법정근로시간 범위에서 일을 시켜야 하고 노동조합은 법정근로시간을 준수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초과근로는 예외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통상임금 문제가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노사 모두 근로시간 문제를 꺼내지 않고 있다. 기업이 크고 임금이 높으면 높을수록, 장시간 노동을 하며 신규 채용을 꺼리고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이 모순적 현실은 우리 노동법이 희망한 바가 아니다. 통상임금 문제는 법정근로시간의 준수로 해결해야 한다. 자동차 업계의 노사 역시 장시간 근로 체제에서 벗어나 혁신을 이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당장의 소득은 얻을지 모르나 우리 다음 세대는 박제된 자동차 공장들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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