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나를 키운 8할은] 이기호 "가난했지만 아닌 척... 유년시절 그 집이 내 소설의 씨앗"

입력
2017.12.02 04:40
16면
0 0

아버지가 빚으로 장만한 주택

방 3칸에 대문 열면 정원까지

겉보기엔 부러울 것 없었지만

거주하는 10여년 빚과의 투쟁

'안방'을 세 주고 '문간방' 신세

다락방 숨어 혼자 책 읽곤 해

학교 가선 환하게 감정 숨겼다

소설가 이기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설가 이기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내 아버지가 당신 명의의 집을 처음 장만한 것은 1977년, 내 나이 6살 때의 일이다. 어느 주택업자가 강원 원주시 외곽에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불란서 풍 주택 10가구를 분양했는데, 당시 전매청을 다니고 있던 아버지도 거기에 막차로 끼게 된 것이다. 방 3칸에 다락방도 2개나 딸린, 실 평수 28평짜리 단층주택.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그마한 정원과 장독대, 연탄을 쌓아 놓을 수 있는 널따란 광도 따로 딸려 있던 집. 그 집으로 이사 오기 전, 아버지의 직장 근처인 학성동 기찻길 옆 단칸방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틀에 한 번꼴로 연탄가스를 마시거나, 매일 수돗물을 많이 쓴다고 주인 할머니의 악다구니를 듣던 처지에서 갑작스럽게 집주인으로, 그것도 집 안에 욕실이 있는 주택의 소유자가 되었으니, 신분상승도 이런 신분상승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는 것이 어머니의 뒤늦은 평가다. 어찌어찌 집을 계약하고 중도금을 내긴 냈지만(그것 역시 반 이상 빚으로 해결했지만), 잔금을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한 아버지 때문에, 이후 10년 넘는 세월 동안 우리 집은 오로지 잔금을 위한, 그 잔금에 붙은 이자를 위한, 투쟁의 시간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그 당시 이미 선도적으로 하우스 푸어가 된 것이다. 꼭 이런 것만 선도적으로 이끌어나간 아버지는, 이후에도 자동차 푸어, 증권 푸어, 상가 주택 푸어 등등으로 시대를 앞서나갔다.

잔금을 갚아나가기 위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선 방 3칸 중 2칸을 세를 주는 것. 하지만 그것도 그리 여의치 않았는데, 불란서 주택 10가구 중 세를 놓지 않은 집은 딸만 7명이었던 하 순경네 집이 유일했다(그 집 식구들은 아직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9집이 모두 세를 놓다 보니 자연 받을 수 있는 월세도 작아지고, 방이 빈 채로 계절을 나는 경우도 왕왕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안방을 세놓는 것.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안방과 건넛방을 초등학교 부부 교사 가족에게 세를 내준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시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이었던 문간방으로 모든 세간을 옮겨야만 했다. 분명 집 주인이지만, 세를 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집.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안방을 차지한 부부 교사를 위해 밥을 차리고 그 집 아이들 빨래를 대신해주는 일도 자처했는데, 그러면 월세 외에 작지만 웃돈을 받을 수도 있었고, 우리 집 반찬값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문간방에서 3년을 살았다.

소설가 이기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설가 이기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학교에 가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쟤네 아버지는 공무원이고, 집은 불란서 주택이야. 80년대 초반, 원주와 같은 중소도시 외곽에서 내 가정환경은 무척이나 훌륭한 것이었다. 반 아이들 중 절반 이상이 농사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두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거주 환경도 낡고 오래된 기와집인 경우가 많았다. 외관상 나는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아이가 분명했다(거기에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우리 초등학교에서 가장 부잣집에 사는 아이였다. 우리 동네에서 커다란 신작로를 건너면 나오는 이층집에 사는 아이. 하지만 그 아이는 몇 년 후 시내로 이사를 갔는데, 그 집에 새로 이사 들어온 사람이 바로 박경리 선생이었다. 친구가 사라진 헛헛함 때문에 나는 자주 그 집에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쳤다). 하지만 실상은 늘 경제 문제 때문에 싸우고, 자기 집 안방을 남에게 내주고 문간방에 사는, 가난한 부부의 아이였을 뿐이었다. 그 격차가 나는 아찔했고, 그 격차를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자주 문간방 다락방으로 숨어 들어가 혼자 책을 읽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읽은 책을 다음날 학교에 가서 같은 반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곤 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가난하지 않은 표정으로.

세월이 오래 흐른 후, 나는 어머니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힘들었으면 차라리 집을 팔고 빚을 정리하지 그러셨어요? 그러자 어머니에게선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빚을 갚아나가는 게 저축이라고 생각한 거지, 뭐... 거기에서 물러나면 다시 연탄가스 새는 방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으니까... 얼마 전,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그 불란서 주택 단지 주변을 산책한 적이 있었다. 지은 지 이제 40년 가까이 된 집들은 낡고 유난히 더 작아 보였다. 한 때는 모두 빛나던 집들이었지만, 이제는 거의 다 주인이 바뀌었고, 지붕에 그려져 있던 바람개비 문양도 희미한 자국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 집에서 나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웠고, 감정을 속이는 법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내 소설의 씨앗이 되었다. 불란서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불란서 주택에서 10년 넘게 거주하는 바람에, 불란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듯한 마음. 그 복잡한 마음으로 소설을 써왔다.

이기호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