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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대통령 그림자도 안 밟아” “노병은 조용히 사라지는 것”... 숱한 어록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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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대통령 그림자도 안 밟아” “노병은 조용히 사라지는 것”... 숱한 어록 남겨

입력
2018.06.24 15:37
수정
2018.06.24 21:1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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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역사는 그냥 거기서 배우는 것”

박근혜 ‘국정농단’ 불거졌을 땐

“하야 죽어도 안 한다” 전하기도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생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생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한국 정치 격동기에 정곡을 찌르는 숱한 어록을 남겼다. 매번 중의적 의미를 담은 말 자체가 더욱 화제가 될 정도였다. 현대사의 증인인 김 전 총리의 별세로 그가 생전에 남긴 말들이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됐다.

평소 달변가로 유명했던 김 전 총리는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촌철살인’을 다수 쏟아냈다. 역사적 고비와 정치적 결단의 순간마다 남긴 말들은 당시의 시대상과 그 삶의 지향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1963년 김 전 총리는 일본과 국교정상화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국민적 반발의 대상이 됐다. 당시 그는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면서 협상 결의를 나타내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같은 해 4대 의혹 사건과 관련한 외유에 나서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난다”는 어록을 남겼다.

1987년 11월 관훈 토론회에서는 “5ㆍ16이 형님이고 5ㆍ17이 아우라고 한다면 나는 고약한 아우를 둔 셈이다”라며 소신을 드러냈다. 같은 해 펴낸 저서 ‘새 역사의 고동’을 통해 남긴 어록 “파국 직전의 조국을 구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5ㆍ16 혁명과 1963년 공화당 창당이라는 역사적 전기가 마련됐다”에서는 그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1990년에는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추대하면서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에둘러 표현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3년 5ㆍ16 민족상 시상식에서는 “역사는 기승전결로 이뤄진다. 5ㆍ16은 역사 발전의 토양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를 일으킨 사람이고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그 계승자다. 김영삼 대통령의 변화와 개혁은 그 전환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거물급 정치인으로서 뼈있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1995년 민자당 대표시절 자신의 퇴진을 거론하는 새배객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덕담하자 “있는 복이나 빼앗아 가지 마시라”고 일갈했다. 1996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해서는 “역사는 끄집어 낼 수도, 자빠트릴 수도, 다시 세울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는 그냥 거기서 배우는 것”이라고 쓴 소리를 했다. 이듬해 자민련 중앙위원회 운영위에 참석한 그는 “내가 제일 보기 싫은 것은 타다 남은 장작”이라면서 “완전히 연소해 재가 되고 싶다”고 열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고단한 정치역정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1998년 총리 서리 당시 기자들이 “서리 꼬리가 언제 떨어질 것 같으냐”고 묻자 “서리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슬금슬금 녹아 없어지는 것”이라고 받아 쳤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회동 가능성을 묻는 취재진에 “백 날 물어봐. 내가 대답하나”라고 응수해 말문을 닫게 했다.

말년에는 인생을 돌아보는 말도 다수 남겼다. 1998년 언론 인터뷰에서는 “봉분 같은 것은 필요 없고 ‘국무총리를 지냈고 조국 근대화에 힘썼다’고 쓴 비석 하나면 족하다”고 했다. 2001년 초 ‘서산에 지는 해’라고 언급한 이인제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의 발언에 대해 “나이 70이 넘은 사람이 저물어 가는 사람이지 떠오르는 사람이냐. 다만 마무리할 때 서쪽 하늘이 황혼으로 벌겋게 물들어갔으면 하는 과욕이 남았을 뿐”이라고 했다.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는 “43년간 정계에 몸 담으면서 나름대로 재가 됐다”고 자평하면서 “노병은 죽진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을 남겨 오랜 기간 회자되기도 했다.

그는 최근까지도 후배 정치인들에게 정치에 대한 고언과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2011년 1월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정치는 허업(虛業)이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그 뜻에 대해 2015년 부인의 장례식장에서 “국민에게 나눠주는 게 정치인의 희생정신이다.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으려 하면 교도소밖에 갈 일이 없다”고 강조했다. 같은 시기에 “대통령 하면 뭐하나. 다 거품 같다”는 말도 남겼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졌을 때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하야 죽어도 안 한다. 누가 뭐라도 해도 소용 없다. 5,000만 국민이 달려들어서 내려오라고 해도 거기 앉아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전하기도 했다.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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