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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천천히 서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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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천천히 서둘러라

입력
2018.01.28 15:4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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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서둘러라. 무슨 말이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반대되는 두 개의 의미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원문은 라틴어인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이다. 로마의 융성기, ‘팍스 로마나’를 이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했던 이야기로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서두르라는 것이다.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 정부가 고강도 대책들을 내놓았다. 왜 강남에 몰릴까? 주요한 이유는 교육과 문화에 있다. 부모세대는 교육을 원하고, 자식세대는 문화를 소비하고 있다. 따라서 부동산 정책을 세울 때는 교육과 문화가 함께 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들 정책간 시너지는 형성되지 않고 있는 듯하다. 너무 복잡한 입시가 대치동 학원가를 필요하게 하고, 무너진 공교육이 강남 8학군의 부활을 알리고 있는 게 단적인 예이다. 반복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수도권 신도시 추가건설은 장기적으로 균형발전을 해쳐 ‘수도권과 사막’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암호화폐 거래소 폐쇄와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에서 2030세대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2030세대 대부분이 암호화폐에 투자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부동산 투기의 대안으로 암호화폐 투기를 허용하라는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시장을 다루는 방법에 있었다. 청와대를 비롯하여 각 부처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와중에 초강수인 거래소 폐쇄가 먼저 나온 것이다. 시장동향을 읽고 서서히 힘을 빼내는 단계와 제도권으로 편입할 수 있는 것들과 물러설 수 없는 원칙을 찾는 것이 먼저 이루어졌어야 한다.

단일팀의 경우 방향은 맞지만 서두른 탓으로 선수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국민들이 우려하는 것은 북핵의 위협이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남북관계가 성과 위주로 흐르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예술단 사전 점검단의 방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한 것을 보고 차분함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자리 창출과 규제혁신이 재차 촉구되고 있다. 청년실업률이 치솟는 상황에서 매우 긴요한 일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실적위주의 일회성 일자리가 아니라 조금씩이라도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양질의 일자리이다. 저성장시대에 일자리는 한 순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고용노동부 하나만 잘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과학기술 및 교육정책이 함께 해야 하며, 연금 등 복지정책이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재원의 투입 역시 중복되거나 비효율적이지는 않는지 점검해야 한다.

규제혁신은 일자리의 창출과 경기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 규제개선은 모든 정부가 내걸었던 약속이다. 그러나 야심 찬 선언에 비해 성과는 상대적으로 작았다. 가장 큰 이유는 규제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조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방에 치우친 규제는 균형을 깬다. 소방차가 못 들어가는 도로를 만든 주차장 및 자동차관련법들,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건물을 만든 건축 및 의료시설 관련법들 모두 효용에 치우쳤다. 융·복합과 새로운 스마트 기술이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타성뿐만 아니라 지나친 문제위주의 생각과 그로 인한 책임추궁의 두려움을 그 배경에 두고 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중간선에 대한 원칙과 역할을 제시할 수 있는 입법이며, 공적규제와 사적책임의 범위와 한계 그리고 기술개발과 안전을 모두 포함한 논의가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끊이지 않는 대화가 좋은 합의와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일에 하나의 이유, 하나의 원인으로만 이뤄진 게 아무것도 없다. 결과 또한 바로 보이는 것과 길게 나타나는 게 서로 다르다. 우리가 중요한 것들을 다룰 때 좌우를 둘러보고 깊은 숨을 골라야 하는 이유이며,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천천히 서둘러라’가 주는 지혜이다.

최승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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