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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출판사 첫 책] <17> ‘천달러 게놈’(2011)

입력
2015.10.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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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MID의 첫 책 '천달러 게놈'
출판사 MID의 첫 책 '천달러 게놈'

2010년 말, 20여 년의 조직생활을 접고 무작정 출판계에 뛰어들었다. 책을 만들고자 하는 오랜 열망이 있었다거나, 어릴 적부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거나 하는, 많은 발행인이 얘기하는 출사의 변(辯)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활자와 종이 속으로 뛰어들며 나는 그저 스스로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조직에 충성하고, 가족에 충성하고…, 충성만 하며 살아 온 지난한 삶에 종지부를 찍고 나 자신에게 충성하고픈 막연한 열망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의 출판 인생은 무모하게, 준비 없이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창문 하나 없는 창고에서 탄생한 첫 책 ‘천달러 게놈’ 역시 서툴고 충동적이었다. 책은 인간의 유전코드(컴퓨터를 작동시키는 프로그램처럼 인간을 작동시키는 매뉴얼로, A, C, G, T 네 개로 이뤄진 30억개 문자의 나열)를 분석하는 게놈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다. 2000년 미국에서 30억달러를 들여 처음으로 분석에 성공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2011년 불과 1,000달러까지 비용이 떨어지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유전정보를 해독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판도를 바꿀만한 충격적인 내용에도 불구, 대중이 접근하기엔 내용이 난해한 것이 사실이었다. 무려 500쪽에 가까운 두께에, 역자 역시 거의 무명으로, 시장성이라곤 찾아 보기 어려웠다. 원서와 대비해 쪽수가 얼마나 늘어날지, 판형은 어떻게 해야 하고, 디자인과 마케팅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딱딱한 의?과학서 앞에서 불안해하던 그때 한가지 위로가 있었다면 이 책이 이 땅에 작은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었다. 이 책을 통해 누군가 진지한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일이었다. 무엇보다 오롯이 나의 선택과 판단에 의해 만들어진 책이었기에 만족감은 달디 달았다. 돌이켜보면 비좁은 창고에서 숨죽이며 교정지 행간을 살피던 중년의 눈에도 세상을 향한 씨앗 같은 희망은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책은 지금 보면 비전문가의 느낌이 물씬 난다. 빨간색 띠지를 두른 벽돌 두께의 책을 본 서점 직원들의 어색한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들은 내가 출판을 계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밤새워 고민하며 열정을 바친 첫 책은 출간하고 얼마 되지 않아 교육과학기술부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되었고, 2013년 4월 개정판이 나왔다.

그 후 5년에 걸쳐 30여 종의 과학책을 만들면서 점차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고,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선정하는 우수과학 도서에 5년 연속 선정되는 과분한 영예도 누렸다. 앞으로도 대중과학서를 꾸준히 출간하는 것이 소박한 꿈이다. 책은 저마다의 운명이 따로 있다는 말을 나는 아직도 믿고 산다. 지천년(紙千年), 견오백(絹五百). 아무리 좋은 비단이라도 오백 년을 못 가지만, 천 년의 생명력을 지닌 책을 어찌 소홀히 할 일인가.

최성훈?MID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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