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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명문(名門)의 조건

입력
2017.10.16 14:46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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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우리나라에도 명문이라 불리는 대학이 있다. 그런데 과연 명실상부한 ‘명문’ 대학일까, 아니면 성적 상위권 학생이 간다고 하여 불리게 된 ‘상위권’ 대학에 그치는 걸까. 범위를 지구촌으로 넓혔을 때 세계적 명문이라 내놓을 만한 대학은 얼마나 될까.

아니, 그런 명문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명문대학은 중등교육과정 성적 우수자가 대거 입학한다고 하여 그냥 되는 것이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그 대학 졸업자가 사회 각계 요로에 많이 진출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건 더욱더 아니다. 적어도 다음 두 가지만이라도 갖추고 있어야 그나마 되고자 할 수 있는 게 명문이다.

하나는 대학 구성원의 탁월함(arete, ἀρετή)이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가 본령이므로 당연히 교수와 학생이 탁월해야 한다. 그런데 교수에게 요구되는 탁월함과 학생에게 요구되는 탁월함은 서로 다르다. 학생의 탁월함은 주지하듯 ‘시험 고득점’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탁월함이 현재적으로 발현되어 있는 경우와 탁월함을 갖출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경우로 나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수는 적어도 자신이 현재적으로 탁월한 동시에 타인이 지닌 잠재력을 보아낼 줄 아는 탁월함도 동시에 갖춰야 한다. 잠재력은 있지만 중등교육을 마치는 단계에서는 그것이 아직 발휘되지 않은 인재를 보아낼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이미 수월성이 입증된 학생을 주로 받아들이고, 이들이 알아서 커서 졸업하게 된다고 하여 명문임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명문은 탁월한 이들이 거쳐 감으로써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함을 갖추게 해주고 더욱 진보케 해줌으로써 증명된다. 입학하기 전에 비하여 졸업할 때는 분명 뭔가 더 나아진 바가 있어야 하며, 그러한 진보가 대학에 의해 추동되고 실현됐을 때 비로소 대학이 무언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할 수 있기에 그렇다.

나아가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자신의 현 상태만으로는 탁월하다고 할 수 없어도 남과 결합되면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거나 남을 탁월하게 만들어내는 경우도 엄연히 탁월함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문의 필수 조건은 학생을 탁월케 하는 탁월함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음과 동시에 타인과 협업함으로써 모두가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역량도 기본으로 갖추고 있음이다. 이러한 기본이 튼실한 대학이 곧 명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잠재력과 협업 역량을 지닌 재목을 가려낼 수 있는 교수의 역량이 대학 차원에서 제도화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대학은 이를 갖추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 대학의 연구역량을 집중시켜 연구해야 한다. 지금처럼 국가의 공적 권위에 기대 일직선으로 줄 세워진 학생 중 상위권을 선점하는 경쟁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대학이 지녀야 하는 탁월함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입학생 평가와 선발제도는 정부 주도로 놔두고 정책 제안이나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좋은 학생을 유치하기 위한 합리적 방안을 대학 스스로 자신이 처한 상황과 지향하는 바에 맞도록 설계해가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개입해야 하는 선이 있다면 그건 중등교육과정까지여야 한다. 전국 단위의 통일된 시험이 필요하다면 그건 고등학교 졸업자격고시여야지 대학입학시험용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국가교육위원회’와 같은 중립적 기구가 해야지 마땅히 없어져야 할 교육부가 주관해서는 안 된다. 고등연구와 마찬가지로 고등교육을 정부가 관리하고 통제하겠다는 개발도상국 시절의 발상은 진작 내려놓았어야 한다. 우리 국력과 국제적 지위가 개도국 수준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지만 정책은 관료주의와 무능, 몰개념에 젖어 개도국 수준서 나온다면 어떻게 평화롭고 풍요로운 선진국형 인문사회를 구현해갈 수 있겠는가.

명문으로서 갖춰야 하는 또 하나의 조건은 제3자가 그 대학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점이다. 탁월함은 자기가 주장한다고 하여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대학의 존재 이유가 사회적 차원에서 비로소 정당화되는 한, 대학의 탁월함은 제3자들도 고개를 끄덕일 때 비로소 공인될 수 있기에 그렇다. 이를 위한 노력은 어디까지나 대학의 몫이다. 대학 스스로가 자신의 탁월함이 공동체에게 선물이 되도록 실천하고 지역사회 교육복지의 플랫폼으로 기능하며 국가의 선한 진보와 풍요 구현에 원동력이 돼야 한다.

이는 당위나 목표가 아니다. 명문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 출발점은 교수가 저마다 연구 탁월성을 갖추는 것이다. 흔히 교수가 응당 행해야 할 바로 교육과 연구, 사회봉사를 든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학술을 기반으로 수행돼야 한다. 그랬을 때 양질의 교육에, 공동체의 선하고도 풍요로운 진보에 지속적으로 기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대학의 탁월함이 제3자에겐 실질적 이익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대학을 제3자가 굳이 자랑스러워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아니, 질시해도 뭐라 할 수 없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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