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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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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죽음을 기억하라

입력
2018.04.15 10:1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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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와 다름 없는 술자리에 있었다. 저녁도 먹었으나 취기가 돌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문득 횟집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가 진동했다. 요즈음 내게 유일하게 어떤 용건도 없이 전화하는, 시를 쓰는 A였다. 그는 첫 시집에 ‘나는 오래도록 친구가 필요했습니다’라고 적었고, 그것이 일없이 내게 전화하고 끊은 다음 적은 문장이라고 술에 취해 털어놓았다. 나는 자리에서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A는 이른 시간임에도 혀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내가 아는 한, A는 가장 취한 상태였다.

“술 먹니.”

“응. 술자리야.”

“자리에 누가 있니.”

“그냥 아는 사람들이 있어.”

“너 얼마 전에, 칠곡에서 추락한 전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불분명하고 빠른 어조라 많이 취해 보였다. 다만 A는 평소에도 전화해 아무 질문을 던지는지라,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건 추락한 비행기지, 뭐. 비행기라면 추락할 확률이 있고, 전투기라면 더 높지.”

사실 그 일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는 편이 맞았다. 나는 순간 2000년대에 미국에서 도입된 F15K의 문제점이라든지, 당시 악화되었던 기상 상황이나 급격한 고도 상승으로 인한 의식 저하를 언급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 별생각이 없는 거네. 그래. 인아. 그런데, 그 비행기가 말이야.”

“응. 말해.”

“그런데 거기 타고 있던 사람이, 네가 2년간 강의실에서 얼굴을 맞대던 제자라면 어떨까. 어떨 것 같니.”

맞다. A는 공군 장교였다.

“그리고 그 남은 미망인이, 너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친구였다면 어떨까.”

“... 저런.”

“그건 들었니. 시체를 수습했는데, 이게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 몰라서, 고스란히 가져와 엑스레이를 찍었대. 그렇게 두 사람이었다는 것을 밝혀내야 했대.”

“... 그걸 찍어놓고, 같은 뼈를 찾았겠구나. 같은 뼈가 나오면 두 사람이니까.”

자연스럽게 그 장면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엉킨 시체를 두고 엑스레이를 찍어 서로 섞인 뼈를 고르는 사람들. 아픔의 세계를 넘어선 폭발하는 죽음. 그리고 내 친구가 가르치던 제자. A가 이른 시간부터 취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래. 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야. 그러니까 인아. 거기 사람들이 있지. 사람들이 있을 거 아냐. 그 사람들에게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야. 이제 친구의 친구의 친구 이야기가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기도를 하라고 해. 그리고 그 다음 잔은 내 친구를 위해 들고. 다 기도를 하라고 해. 그리고 추락한 전투기 이야기도 하란 말이야. 명복도 빌고. 내 친구니까. 해야 해. 그건 제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알았지? 다 하면 내가 다시 전화할게.”

A는 전화를 끊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자 입맛이 아릿해졌다. 통화를 듣던 사람들은 일순간 침통해졌고,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길고 진득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우리의 술자리는 당연히 이름 모르는 그에게 바쳐졌다. A는 더 취해버렸는지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비통한 A가 정신을 잃고 어딘가 쓰러져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문득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좋은 술을 가방에 담아 다니던, 시를 쓰는 P를 생각했다. 취해서 돌아오던 밤, 그는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 죽기 전에 먹으려던 것이라며 내게 나누어주었다. “어릴 적부터 죽음을 너무 많이 봤어요. 그래서 내일 죽게 된다면 오늘 마실 술이 필요했어요. 같이 마셔요. 죽게 될 수도 있잖아요. 내일이라도.” 그가 꺼낸 술은 유난히 독하고 어지러웠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밤은 깊어져만 갔고, 우리는 기억해야 할 죽음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에 지쳐 우리의 죽음도 언젠가 다가올 것만 같았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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