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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잠시 숨을 고르며

입력
2017.09.2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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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은 선친의 고향이다.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 덕개라고 했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선친을 따라 시사(時祀)에 참례한 적이 있다. 이제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부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남해고속도로를 달려간 먼 여행은 힘들었던 차멀미의 기억과 함께 남아 있다. 넓은 마당 한쪽에 차일을 치고 큰 솥에 끓여내던 국이 생각난다. 돼지고기를 넣고 벌겋게 끓인 국이었는데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비 내리는 쌀쌀한 날씨에 마루 한쪽에 앉아 국밥을 먹은 기억이 생생하다. 꽤 큰 한옥이었는데 선친이 나고 자란 집이란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때 우리는 부산에서 단칸방에 살고 있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시사 참례였고, 내가 군대 있을 때 돌아가신 선친 산소가 남해 바다 앞 노량에 있는데도 하동에 가본 게 몇 차례 안 된다. 성묘마저 게을리한 지도 오래됐다.

그런데도 누가 고향을 물으면 꼬박꼬박 하동이라고 대답해 왔다. 이즈음이야 부친의 고향을 자신의 고향으로 삼는 관행도 많이 흐릿해진 걸로 안다. 어쨌거나 선친은 언제나 하동 분이었고, 하동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밝아지셨다. 소설가 이병주 선생이나 악양 평사리 이야기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자주 걸음 할 형편은 아니었으니 시사 때나 다녀오시지 않았나 싶다. 선친은 좌익 활동이 문제가 되어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큰 화는 면했으나 그 뒤로 변변한 직업 없이 살다 가셨다. 선친의 일로 심하게 고초를 치렀던 숙부는 나중에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는데 작년에 돌아가셨다. 내 본적지는 하동이 아니고 산청이었는데, 그렇게 호적을 옮기게 된 연유도 선친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산청의 작은 숙부 역시 지리산 산사람이 되어 젊은 날에 세상을 버렸다.

난 지금도 서부경남 쪽 말씨는 바로 알아듣는다. 작년 상가에서 만난 하동 큰누이가 수야 하고 부르며 건네던 하동 말은 어찌나 환하고 달던지. 지금 칠순을 넘긴 누이는 섬진강 건너 광양 다압면으로 시집갔고 평생을 거기서 살고 계신다. 다압은 광양시이지만 생활권은 하동이고 차의 전남 번호판 때문에 종종 괄시를 당했다던 매형의 말씨도 하동 사람과 진배없다.

“하동쯤이면 딱 좋을 거 같아. 화개장터 너머 악양면 평사리나 (…) 어릴 적 돌아보았던 악양 들이 참 포근했어.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 / 하여간 그쯤이면 되겠네. 섬진강이 흐르다가 바다를 만나기 전 숨을 고르는 곳. 수량이 많은 철에는 재첩도 많이 잡히고 가녘에 반짝이던 은빛 모래 사구들.”(‘하동’ 부분, 이시영 시집 ‘하동’, 창비)

그래, 재첩. 한 편의 시를 이렇게 골똘하게 읽은 적이 있었나 싶다. 시인의 고향인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가 지켜본 젊은 매형 이상직 서기의 죽음(‘산동 애가’)이나 세상 너머까지 이어지는 사촌간 우애의 시(‘형제를 위하여’)는 저 지리산 산사람들의 사연으로 너무 아프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 ‘문학’을 읽는 것이다. 자신의 얼굴, 자신의 기억에의 향수를 끊고, 아무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해”(‘나쓰메 소세키론’, 이모션북스)라고 존재의 변용을 실천하는 ‘표층 비평’을 감동적으로 마무리하지만, 기실 우리의 기억 역시 무슨 심층이나 답답한 의미의 자장에 환원되기만 하는 것은 아닐 테다. 그것은 때로 ‘잠시 고르는 숨’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희박하고 가벼워서 역사의 잔혹한 무게도 어쩌지 못하는 지금 당장의 숨. 시인이 들려주는 ‘하동’은 그 순간을 전하고 닫힌다. “하동으로 갈 거야. 죽은 어머니 손목을 꼬옥 붙잡고 천천히, 되도록 천천히. 대숲에서 후다닥 날아오른 참새들이 두 눈 글썽이며 내려앉는 작은 마당으로.” 추석이 며칠 앞이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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