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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광장에서

입력
2016.11.21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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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는 사람이 외친다. “여기 모인 시민 여러분은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남성이거나 여성이거나, 장애인이거나 비장애인이거나…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깔개 없이 맨바닥에 주저앉은 것이 슬슬 후회가 되는 시점에서, 차가워진 엉덩이만큼 마음이 좀 불편해진다. 나는 과연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차별과 편견 없이 대해 왔는가. 주위를 둘러본다. 내 주위에 촛불을 들고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고 해도 나를 평등하게 대해 줄 것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주차 요금을 아끼려고 골목의 빈 자리를 찾아 다니며 불법 주차를 감행하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싼 값으로 물건을 사기 위해 하루 종일 인터넷을 뒤지며 최저가 검색을 하는 사람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문만 듣고 남의 험담을 한 적이 있으며, 착오가 생겨서 쇼핑몰에서 두 번 보내준 물건을 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인 적도 있다. 노숙자 행색인 사람들이 말을 걸거나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꺼려했으며,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호감을 가지거나 더 예의 바르게 대할 때도 있었다. 지금 현재 내가 가장 부러운 사람은 대한민국 어딘가에 자기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솔직히 나는 신뢰할 수 있는 사회적 성취를 이루었거나 준법정신이 강하거나, 누구나 차별과 편견 없이 대하는 올바른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존중받을 만한 시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 순간, 시민발언대 위에 올라가 고발하고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 순간, 래퍼와 로커들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는 이 순간, 촛불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파도타기를 하는 이 순간, 국민을 기만해 온 부패한 대통령을 향해 퇴진하라는 함성을 질러대는 이 순간, 세상은 어차피 공정하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으며 항상 그래왔으므로 99%에 속하는 개ㆍ돼지들은 1%의 잘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는 그들에게 분노할 수 있는 이 순간, 이 순간만큼은 내가 존중받을 만한 시민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광장에 모여 있는 우리 모두가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된다.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둡고 혼란스런 부분을 밀어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길고 다양한 평범함의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나 또한 그 스펙트럼의 어딘가에 속해 있을 것이다. 그러한 평범함 덕분에, 이런저런 실수와 잘못에 자주 걸려 넘어지며 살아가고 있는 나는, 심각하고 위중한 반인류적 범죄 같은 것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거나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욕망에 깊이 휘말려 들지 않을 수 있었고, 그렇게나 중독성 있다는 달콤한 권력의 맛, 타인의 삶을 디딤돌 삼아 번성한 행복으로부터도 멀어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여기에 불 좀 붙여 주시겠어요?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이 머뭇거리며 나에게 불 꺼진 초를 내민다. 바람이 불었나. 나는 초를 종이컵 위로 밀어 올려 불을 붙여준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며 머리카락을 조심하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몇 살이에요, 이름이 뭐에요, 이것저것 더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그냥 이것으로 됐다고 생각한다.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지면 언제든지 옆 사람에게 붙여 달라고 부탁할 수 있으니까. 함께 모여서 말하고 듣고, 함성을 지르고, 행진하며 저항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거나 황폐해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것을 믿으면서 오래 오래 광장을 지킬 수 있으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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