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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엄마의 종교생활

입력
2017.12.29 14:45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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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일흔 살 가까운 나이에 종교를 가졌다. 30여 년 전, 젊은 전도사 부부가 개척한 동네 교회에 가끔 쌀이며 채소를 보내는 눈치였지만 순전히 오지랖이었다. 하필 배타적인 시골 동네에서 교회를 연 그들이 끼니 거르는 불상사가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 교회 연 지 3년 넘도록 신 새벽 동네 길을 매일같이 쓰는 젊은 목회자를 엄마가 각별하게 보는 마음은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성경책 들고 예배당까지 갈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만큼 엄마는 완강한 무신론자였다.

그 어떤 신이든 갈구할 필요 없이 현실에 꼿꼿하던 엄마를 돌려 세운 건 자식들이었다. 여섯 째 딸이 목회자와 혼인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 막내딸까지 기독교도가 되더니 그 셋이 똘똘 뭉쳐 엄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 눈에 협박이 따로 없는 몇 년간의 전도가 힘을 발휘했는지 엄마는 언젠가부터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외우고 세례를 받았다.

“내가 매사 신중해서 그렇지, 어금니 질끈 물고 시작만 하면….” 어릴 적, 신물 나도록 들었던 엄마의 자기 자랑이었다. 그러면서 작심삼일로 그치기 일쑤인 우리 자매의 습성이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약점이라고 은근슬쩍 덧붙였다. ‘참, 가당찮은 소리 하고 있네!’ 아버지를 유독 편애한 나는 엄마의 자랑을 들을 때마다 끓는 부아를 안으로 삭이며 실컷 비웃었다. 한데 종교생활로 본 엄마의 의지력은 진정 곧고 굳센 데가 있었다. 세례를 받은 이후 엄마는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는 물론 신방까지 꼬박꼬박 챙겼다. 아버지의 전언에 따르면, 아침잠 많은 내가 신심의 척도로 삼는 새벽 예배에도 아주 성실히 임한다고 했다.

그쯤 되니 슬슬 호기심이 생겼다. 저렇게 열심히 교회에 가서 뭘 하시는 걸까. 어느 해 명절 연휴였다. 고향집에 내려가 늦은 밤까지 TV를 보다가 거실에서 잠들었다. 새벽녘 엄마가 거실 쪽으로 나와 밖을 보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오늘은 눈이 많이 내려 교회에 못 가겠다, 그러니 집에서 예배를 드리겠다고 전했다. ‘드디어 엄마 종교생활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겠구나.’ 나는 자는 척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다렸다. 주방 쪽 식탁에 앉은 엄마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주님, 오늘도 이렇게 무사히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의 입에서 겸손한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낯선 감동이 일렁인 것도 잠시. 아버지와 큰언니부터 온가족, 아픈 동네 어르신들까지 줄줄이 호명되며 상세한 구복기도가 30분 넘게 계속됐다. 내 이름 뒤로 이어진 기도내용을 들을 무렵부터 나는 이불 속에서 키득거렸지만 엄마는 그 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열중하는 듯했다.

그날 아침 설 떡국을 먹다 내가 한마디를 했다. “엄마네 주님 말이야. 엄청 피곤하실 거 같어.” “얘가 무슨 소리래?” 눙치려는 엄마를 돌려세웠다. “이런 촌구석 노인네까지 구구절절 간청만 한가득이니, 세상 하고많은 기도내용 수리하려면 얼마나 귀찮을까. 엄만 그냥 쿨하게 감사기도나 드리는 게 어때?” 민망한 듯 떡국을 먹던 엄마가 이내 정색하며 받았다. “그러니까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말로 바라는 걸 말해야지. 거듭 애원하면 하나님도 새겨들으시겠지.” 딸의 비아냥 따위 가볍게 뭉갠 엄마의 기도는 이후로도 계속됐고, ‘의지력 약한’ 남편까지 기어이 팔순 넘어 주님 앞에 무릎 꿇게 했다.

그 부모님이 지난주 결혼 60년을 맞았다. 스물여덟 명 가족이 모인 자리를 둘러보다가 홀로 두 손을 모은 엄마에게 시선이 닿았다. 이게 다 엄마의 기도빨은 아닐까, 불현듯 그 생각이 들었다. 나도 기도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잠깐 스쳤지만, 애원의 대상도 내용도 떠오르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보가 된 나는 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만 부지런히 입으로 우겨넣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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