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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멀크러시] 액체괴물 주무르며 쉬는 2030, 화려한 건 촌스러워

입력
2018.01.06 14:28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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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혼자 산다’ 보고, 소소한 콘텐츠에 열광

78% “성공적 미래보다 현재 일상에 더 집중”

지금의 청년세대는 화려하게 빛나는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문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며 성장했다. ‘헬조선’이라는 붉은 딱지를 노려 보면서도 자기계발서와 토익책을 쉽사리 손에서 놓을 수 없던 이유다. 그 ‘성공’이란 것, 조금만 노력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아무리 각종 계발서를 탐독하고 스펙을 쌓아도, 어른들이 말하던 화려한 성공은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 보통의 존재로서의 나를 긍정하지 않으면 삶을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보통의 존재로서 바라보면 기존의 성공도 그다지 행복할 게 없어 보인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해 6월 전국 만 13세~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이 질문에 가장 많이 ‘그렇다’고 답한 세대는 20대였다. 무려 77%나 됐다. 이어 10대 65%, 30대 61.5%, 40대는 55.5% 순으로 조사됐다. 남의 시선이나 사회통념을 의식하지 않고 '평범하더라도 행복한 내 삶'을 살고자 하는 노멀크러시의 경향이 20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다.

지난해 8월 JTBC 예능프로그램 ‘한끼줍쇼’에서 가수 이효리는 길에서 만난 초등학생 소녀에게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라는 말을 건넸다. 평범한 삶도 충분히 훌륭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조언이었다. JTBC 제공
지난해 8월 JTBC 예능프로그램 ‘한끼줍쇼’에서 가수 이효리는 길에서 만난 초등학생 소녀에게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라는 말을 건넸다. 평범한 삶도 충분히 훌륭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조언이었다. JTBC 제공

저성장 기조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는 청년 세대는 화려함은 촌스러운 것으로, 작고 소박한 것은 세련되고 멋진 것으로 인식한다. 일상복을 최전선으로 내놓은 놈코어(Normal+Hardcoreㆍ평범함을 추구하는 패션을 지칭) 트렌드는 지난해 파자마패션으로까지 이어졌고, 덴마크 전통문화인 휘게 열풍에서 출발한 인테리어 및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는 ‘휴식을 즐기는 소박한 행복’이란 콘셉트면 나라를 가리지 않고 유행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 같은 평범함에의 매료는 소비하는 콘텐츠에도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인위적인 연출이나 장치를 최소화해 화려하게만 보였던 스타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프로그램이 주로 노멀크러시족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넌 할 수 있어’라는 부담스러운 위로보다 ‘나도 너와 다르지 않아’라고 말해주는 듯한 일상적인 콘텐츠를 접할 때 비로소 평범한 ‘나’에 안도하며 편안함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지난해 5월 수도권 거주 20대 남녀 6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8.7%가 ‘인생역전 성공스토리보다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담은 콘텐츠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유명인보다 일반인의 인터뷰와 강연에 공감과 동기부여를 느낀다는 응답도 40.7%에 달했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호흡의 tvN ‘윤식당’, JTBC ‘효리네 민박’ 등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것이 대표적이다. 노멀크러시형 콘텐츠인 ‘나혼자산다’(MBC)를 시청한 비율은 응답자의 84.1%에 달했고, ‘윤식당’도 65.7%로 뒤를 이었다. TV드라마에서도 tvN의 ‘식샤를합시다’(47%), ‘혼술남녀’(46.3%) 등 소소한 일상을 담은 드라마가 2030세대 노멀크러시족의 지지를 받았다.

평범한 일상을 추구하려는 시도는 소셜미디어에서도 이어졌다. 페이스북 페이지 ‘무자극 컨텐츠 연구소’가 올리는 이미지들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맑은 하늘, 지하철역 스피커, 김밥용 밥 등 보정 없는 이미지에 ‘회전하는 선풍기입니다’,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입니다’ 같은 무미건조한 코멘트를 달았을 뿐인데도 무려 5만4,500여명이 페이지를 구독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슬라임 유르’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온 슬라임(끈적하고 말랑한 점액질 형태의 장난감) 사진. 슬라임을 주물럭거리면서 나는 소리를 듣는 지극히 평범한 행위는 2030세대의 훌륭한 휴식 도구가 됐다. 인터넷 캡처
지난해 12월 ‘슬라임 유르’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온 슬라임(끈적하고 말랑한 점액질 형태의 장난감) 사진. 슬라임을 주물럭거리면서 나는 소리를 듣는 지극히 평범한 행위는 2030세대의 훌륭한 휴식 도구가 됐다. 인터넷 캡처

2030세대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에도 관심을 쏟으며 ‘무위(無爲)’에 시간을 투자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액체괴물, 일명 슬라임(끈적하고 말랑한 점액질 형태의 장난감)이다. 알록달록 색만 입혔지 생긴 것은 영락없는 밀가루 반죽이지만, 슬라임 동영상은 2030세대에게 어엿한 휴식의 도구가 됐다. 유튜버 ‘츄팝’이 지난해 7월 올린 슬라임 제작 영상은 조회수 318만을 기록했다. 유튜브 채널 Kaya ASMR(소리로 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가 지난해 6월 제작한 ‘묘하게 만족스러운 슬라임들’이라는 영상은 163만 조회수를 올렸다. 신나는 아이돌 노래가 아닌, 슬라임이 손끝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게 이유였다.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아도 바쁜 일상 속 지친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편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2030세대는 기꺼이 자신의 돈과 시간을 쓴다.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몰입하기보다 현재의 일상과 여유에 더 집중하겠습니까?’ 대학내일20대연구소(2017 밀레니얼 세대 행복 가치관 탐구 보고서)가 지난해 12월 20세~39세 남녀 800명에게 물은 이 질문에 응답자의 78%가 ‘그렇다’고 답했다. 아무리 사소해도 지금 누리지 않으면 기약할 수 없는 것,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그것이 행복이다. 노멀크러시 열풍은 뜨겁게 불다 이내 그칠 잠깐의 유행이 아니다.

오희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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