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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음악이 흐르는 쉼

입력
2016.09.2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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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마음의 여유를 찾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다. 두서없이 벌려놓은 일들이 워낙 많다. 학업만 해도 뒤늦게 시작하다 보니 한참 어린 동기들에 뒤지지 않으려면 새벽바람 불 때까지 책을 봐야 겨우 꽁무니 정도 따라갈 수 있다. 더구나 이번 학기에는 전공대표라는 ‘머슴일’을 맡게 되어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태산이다. 그뿐만 아니라 밀려드는 부탁이나 요청들을 거절하지 못해 늘 분주하고 어수선하다. 일정관리에 요령이 없어 실수로 약속이 겹칠 때도 아주 많다. 경황없이 뛰어다니는 흉한 모습에 스스로 혀를 찬 적도 여러 번이다.

무엇보다 처자식이 있는 가장인 탓에 밥벌이가 가장 신경 쓰인다. 수단이 변변치 않아 무엇이든 들어오는 일이면 가리지 않고 대들어야 한다. 명색이 사진가이니 작품화된 사진이 팔리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언강생심,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진 관련 대중강연이 호구지책의 거의 전부이기에 요청이 있으면 무조건 단상 위에 오른다. 평소 말이 짧은 나로서는 쉼 없이 말을 해야 하는 강연이 종종 곤혹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외 소소하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성에 얽힌 일로 인해 복잡한 상황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요즘이다.

이 모든 번잡한 일상이 전부 내가 벌인 일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모두를 챙기려는 무리한 욕심에서 나온 탓이라는 걸 이미 잘 안다. ‘오지랖 대마왕’이라는 누군가의 농 섞인 지적처럼 나는 정말이지 수없이 많은 인연에 허둥대며 살아간다. 그런데도 아직은 이 욕심을 내려놓을 생각이 크지는 않다. 대부분 사람의 인연과 연관된 일이고 종종 숨만 찰 뿐 내 시간이 그런 쓰임새로 채워진다는 것에 나름의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쉴 때가 되면 쉬어야 한다. ‘쉼’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을 지속할 수 없다. 틈을 내어 몸과 마음을 다독여주지 않으면 스스로 버틸 재간이 없다. 과거에는 라면이나 쌀 따위 몇 줌 챙겨서 단골 휴양림의 방갈로 하나를 빌려 며칠 동안 처박히곤 했었다. 입 꼭 다물고 대자연의 기운에 몸을 맡기는 그 순간은 더없이 편안한 휴식이요 회복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있는 상태에서 홀로 그 짓을 하기에는 맘이 편치 않다. 그래서 요즘 택한 방법이 아날로그식 음악감상이다. 한동안 내 재산 1호는 LP였다. 집 거실 한쪽 벽에는 대학 시절부터 모으기 시작한 LP가 1,000여 장 넘게 채워져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히 대하기는 했지만 요즘 들어 다시 청음의 여유를 되찾아가는 중이다. 장르도 아주 다양해서 기분에 따라 꺼내어 턴테이블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캔맥주 한두 개와 땅콩 몇 개만 옆에 있으면 깊은 가을날 하루쯤은 충분히 여유로워진다. 얼마 전에는 대표적인 하드록밴드 레인보우의 ‘레인보우 아이즈'를 들었다. 보컬 로니 제임스 디오의 절절한 목소리에 푹 빠져 흐느적거리다 보면 7분 21초짜리 대곡이 금방 끝이 난다. 두세 번 턴테이블 바늘을 되돌려 충분히 듣고 나서야 흡족하게 다른 음반을 펼쳐 들게 된다. 가을에 듣기 좋은 음악으로는 1980년대 노르웨이 출신 모던록 그룹 아하(A-ha)의 ‘헌팅 하이 앤 로’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활동 중인 보컬 모튼 하켓의 감미로운 음성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프랑스의 매력적인 샹송가수 파트리샤 카스와 에릭 클랩턴의 처연한 언플러그드 기타협연까지 듣고 나면 어느새 가슴이 후끈해진다. 잠시 숨을 고르고 박인수의 ‘봄비’를 꺼냈다. 제목은 ‘봄비’인데 가을비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곡이다. 한대수의 걸걸한 ‘물 좀 주소’를 들으면 막걸리 한 사발이 절로 그리워지는데 그즈음이면 이제 한결 마음이 편안해져 있다.

1,000여 장의 다양한 LP들이 아직 내 곁에 있다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밖에 없는 요즘이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소중한 내 가족이 있는 집안에서 이렇듯 나만의 휴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작지만 큰 행복이다. 청음 휴식의 마지막은 늘 김광석이다. ‘동물원’ 시절의 LP를 포함해 모든 음반을 가지고 있고 그의 모든 노래를 좋아하지만, 이맘때가 되면 역시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를 듣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 시간 수도 없이 이사를 하면서도 LP들을 버리지 않고 간직해 왔다. 좋아하는 음반을 찾아 여기저기를 뒤지던 옛 추억의 증거품 정도나 될까 했는데 어느새 내게 작지 않은 위안의 산물이 되었다니 새삼 든든하다. 기회가 닿는다면 이런 일상의 여유를 공유하는 마음으로 지인들을 초대해 한밤의 청음파티라도 열어볼까.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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