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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종호의 판사의 길] 진실발견을 위한 법관의 고뇌

입력
2017.11.09 11:16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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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보장’과 ‘진실발견’은 재판의 두 가지 이념이다. 이 둘은 상호간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며 재판의 과정을 지배하고 결과를 이끌어낸다. 먼저, 재판에서 진실의 탐구는 이해당사자가 마구잡이로 제출한 자료를 가지고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이 보장하는 절차와 시간의 한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한편, 재판에서 절차의 보장은 당해 사건의 진실 탐구라는 목적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다른 사건에 대비하여 증거자료를 미리 확보하고자 하는 등의 경우에는 배제된다. 결국 재판에서의 진실발견은 절차보장이라는 제약 하에 행해질 수밖에 없고, 이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법관에게도 진실을 발견하게 하기 위한 무한정의 시간을 부여할 수 없도록 만든다.

재판 절차에서는 이러한 제약 아래서 진실을 찾아나가야 하기 때문에 민사법 영역에서는 ‘형식적 진실주의’라고 하고, 형사법 영역에서는 진실발견에 좀 더 신중하자는 취지에서 ‘실체적 진실주의’라고 할 뿐 순수하게 ‘진실주의’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현실 아래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건에 따라서는 간혹 판결을 통해 선언한 ‘사실’이 ‘진실’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증거가 숨겨지거나 분실되는 등으로 인해 진실을 밝힐 수 없는 경우도 있고, 허위의 진술이나 증언으로 인해 진실이 왜곡되는 경우도 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진실을 찾아내어야 할 책무를 지닌 법관의 고뇌는 깊을 수밖에 없다.

판사 초임시절 배석판사로서 겪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A라는 여성이 남편인 B를 상대로 이혼 및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B가 C라는 여성과 내연관계에 있고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정행위와 관련해 제출된 자료로는 C가 운영하는 식당의 한 테이블에서 B와 C가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한 장의 사진밖에 없었고, 그 외에는 부정행위를 의심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그 장면에 관하여 B는, C가 운영하는 식당의 단골손님으로서 홀로 식사하던 중 잠시 C와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럼에도 A는 두 사람의 부정행위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C를 증인으로 소환해 신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B의 동의를 얻어 C를 증인으로 소환해 신문을 실시했다. A와 그녀의 변호사는 번갈아 가며 부정행위의 정황을 캐내기 위해 1시간가량 C에게 집중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C로부터 유리한 진술을 전혀 받아내지 못했다. 심리를 마친 뒤 필자를 비롯한 3명의 재판관은 증거 상으로는 B와 C의 부정행위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겠다는 데 잠정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필자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야근을 마치고 밤 11시경 귀가하기 위해 근처의 지하철역으로 갔다가 법정에서 본 B와 C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모습을 우연히 본 것이다. 밤늦은 시각이라 행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착각을 할 만한 상황도 아닌지라 불과 몇 시간 전 법정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핏대를 올리던 두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니 그저 실소가 나올 따름이었다. 다음날 사무실에 출근하여 전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더니 동료들은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처럼 당사자가 마음먹기에 따라 법정에서 진실이 왜곡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우리 사회는 가까운 일본에 비해 무고나 위증 사건이 월등이 많다. 사실만을 말해도 진실 발견이 어려운 형편인데 무고와 위증이 도를 넘고 있는 현실 아래서는 판사가 아무리 추론능력을 갈고 닦는다 해도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난생 처음 법정에서 만나게 되는 당사자들의 말이나 제출된 증거를 가지고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진실을 가려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가려내기 위해 사무실 책상머리에 앉아 꼬박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때로는 진실이라고 확신했던 것이 결코 생각지도 못한 사정으로 뒤집혀 버리는 일을 경험하기도 한다. 또 100%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판결을 선고했는데 당사자들이 상소하지 않으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쉬기도 한다. ‘CSI: 과학수사대’라는 미국 드라마에서처럼 과학적인 방법으로 속 시원하게 진실을 드러내어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정의의 실현이라는 쾌감을 선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법관 앞에 닥쳐진 재판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다. 다초점렌즈를 끼고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 속을 책벌레처럼 헤집고 다니는 판사들의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보통의 인간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뢰와 정직은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다. 일례를 들면, 유대인들이 국제 다이아몬드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유대인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신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사회가 한 단계 더 수준 높은 사회로 진입하려면 신뢰 지수가 한층 더 높아져야 한다. 법정에서 진실이 은폐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점차 줄어 정의가 바로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천종호 부산가정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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