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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도 탐낸, 처연하고 아름다운 SF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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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도 탐낸, 처연하고 아름다운 SF소설

입력
2017.02.2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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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문명과의 접촉을 다룬 영화 ‘컨택트’ 속 외계인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데 다 담은 문장을 구사한다.
외계문명과의 접촉을 다룬 영화 ‘컨택트’ 속 외계인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데 다 담은 문장을 구사한다.

미래를 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안다는 가정에 가장 흔히 따라 나오는 가벼운 농담 중 하나는 아마 복권 번호에 관한 얘기일 것이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일단 다음주 복권 당첨번호를 알아내어 부자가 되는 거야!

그러나 만약 ‘정말로’ 미래를 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내일의 내가 다음주의 복권 당첨 번호를 알고 복권을 사러 가는 길에 즉사하는 미래를 안다면? 혹은 내가 복권에 당첨된 후 돈을 다 잃고 더 비참하게 사는 미래를 복권 당첨 번호와 동시에 보았다면? 이렇게 미래에 대한 지식이 선택적이지 않고 총체로서 존재하되, 그 미래에 대한 지식이 그 지식을 바탕으로 다르게 행동할 기회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다시 말해, 미래를 알아도 바꿀 수는 없고, 단지 미래를 아는 상태에서 현재에서 정해진 미래를 향해 하루씩 살아나가야 할 뿐이라면? 그런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그런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ㆍ김상훈 옮김

엘리 발행ㆍ448쪽ㆍ1만4,500원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동명의 중편 표제작은 바로 이 질문을 독자에게 정면으로 던진다. 어느 날 갑자기 미확인우주물체(UFO)들이 지구에 도착한다. 인간은 구조도 기능도 파악할 수 없는 기이한 우주선에는 다리가 일곱 개인 외계 생명체들이 타고 있다. 인간들은 다리가 일곱 개라서 일단 ‘헵타포드’라 이름 붙인 이 외계 생명체들과 의사소통할 방법을 궁리한다. 이들은 왜 굳이 지구에 왔을까? 그 목적이 사악하거나 위험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고등기술을 대체 어떻게 발전시켰을까? 인류는 이들을 이용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까? 무역이나 거래는 가능할까?

언어학자인 루이즈는 헵타포드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물리학자 게리와 팀을 이루고, 인류와 전혀 다른 생명체를 직접 만난다. 그리고 헵타포드가 지구에 온 목적을 알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분석하고 배우며, 종래에는 구사하기 시작한다. 테드 창은 언어가 사고의 틀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독자에게 우선 두 가지를 보인다. 첫째, 평범한 우리가 갖고 있는 ‘읽고 쓰는’ 언어에 대한 관념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 둘째, 언어는 사고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것.

우리는 순서대로 발화하는 데 익숙하고, 발화하는 대로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당장 지금 당신은 이 글을 순서대로 읽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내가 생각한 순서대로 쓰였다. 우리는 이런 선형의 세계, 현재에서 미래로, 앞에서 뒤로 나아가는 방향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 현재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할 자유의지를 가진 시간이다.

그러나 헵타포드들은 우리와 다르다. 이 외계생명체들은 완성된 문장, 결론을 이미 아는 상태에서, 당연히 도달할 -필연적인- 상태를 언어로 구현한다. 루이즈는 이 전혀 새로운 방식의 언어에 ‘어의문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외계생명체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헵타포드어를 익힌다.

아, 나는 어째서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을까? 창의 이 소설은 나의 설명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아름답다. 창은 인간인 루이즈가 헵타포드어를 배우며 점차 헵타포드처럼 사고하게 되는 과정을 담백하게 따라간다. 저자는 외계 생명체와 인류의 접촉, 언어와 사고의 관계, 인간의 자유의지 같은 거대한 화두들을 다루면서도 장황한 설정놀이나 안이한 운명주의에 빠지지 않고, 독자가 서 있는 현재를 통째로 끌어당긴다.

이 소설은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고 이를 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크고 무거운 질문을 다루는 데 있어 과학소설이 얼마나 어울리는 장르인지, 그리고 훌륭한 과학소설이 얼마나 우아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운명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마치 예정되어 있었던 것 같은 생의 분기점들, 미리 알고 있었다 해도 탈색되지 않는 기쁘고 슬프고 생생하고 아득한 ‘지금 이 순간’들.

이 소설은 봉준호 감독이 직접 각색하고 싶어 했던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독특한 소설을 대체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였는데, 드니 빌뇌브 감독, 에이미 애덤스 주연 ‘컨택트’(원제 Arrival)로 완성되어 얼마 전 국내에서도 개봉했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널리 유명했던 이 원작소설이 영화 홍보 과정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은 것은 의아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 개봉을 계기로(혹은 핑계삼아) 마침 재출간된 이 걸작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해 본다. 당신이 영화 ‘컨택트’를 보았든 보지 않았든, 미래나 운명에 관해 복권 당첨 번호 같은 작은 상상이라도 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소설을 권하고 싶다. 이 처연하고 아름다운 과학소설을.

SF작가ㆍ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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