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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는다, 고로 존재한다] 패션계도 베끼기 만연, 개성 사라지고 트렌드화

입력
2015.06.2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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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수이(왼쪽)의 디자인을 베낀 포에버 21의 옷 중 하나.
안나 수이(왼쪽)의 디자인을 베낀 포에버 21의 옷 중 하나.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사태로 문학계가 시끄럽다. 출판사는 작가를 감싸다가 대중의 저항에 부딪혀 사과성명을 냈다. 작가는 마지못해 사과를 했지만 ‘기억의 착오’를 들먹이며 문제가 된 작품을 책에서 빼는 선에서 정리하겠다는 미온적인 입장만 거듭했다.

이런 식의 표절과 사과는 패션계에도 만연하다. 패션에서 표절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건 20세기 초반이다. 유럽 패션의 중심지 파리가 컬렉션을 발표하면 미국의 주요 백화점 바이어들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잠입시켜 주요 작업내용을 대량으로 베껴냈다. 파리 패션의 향방과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파리의상조합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컬렉션마다 복제될 품목을 정해 허가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은 “카피는 성공이 치러야 할 몸값”이라며 이에 반대했다. 디자인 복제는 패션의 민주화에 일조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한편 당시 샤넬의 라이벌 폴 푸아레는 자신의 컬렉션 중 일부를 직접 선별, 진짜 짝퉁(Genuine Reproduction)이란 뜻의 레이블을 붙여 한정된 수의 대량생산을 허가하기도 했다.

패션의 카피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이브 생 로랑은 1994년 턱시도 드레스를 카피했다는 이유로 폴로 랠프 로렌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승소했다. 하지만 이브 생 로랑의 예전 수석 디자이너였던 존 갈리아노는 광고 캠페인에서 미국의 사진작가 윌리엄 클라인의 작품을 베꼈다. 윌리엄 클라인은 여러 장의 컷이 연결된 필름 자체를 인화하는 밀착인화 방식을 고집했다. 여기에 각 사진의 테두리에 회화적인 처리를 가미, 독자적인 자신만의 양식으로 만들었다. 이걸 갈리아노가 그대로 복사 및 붙여넣기를 한 것이다. 그는 법정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이라 항변했지만 패소했고, 14만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디자이너 안나 수이가 대형의류체인 포에버 21과의 법적 투쟁을 벌인 스토리는 한 권의 책으로 쓰기에 충분할 정도다.

그런가 하면 국내 디자이너들이 시장조사란 미명하에 벌이는 샘플 구매와 반품행위는 악명이 높다. 백화점 의류매장마다 ‘샘플용 구매 및 반품사절’을 내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견 패션 업체가 1인 비주류 브랜드의 컬렉션을 복제해 버젓이 파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패션계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베끼기 문화, 나아가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표절문화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패션은 일종의 글쓰기다. 패션 디자이너의 작업도 문필가의 작업과 다르지 않다. 매 시즌마다 수십 여벌의 옷을 유기적으로 묶인 주제 하에 발표한다. 디자이너들은 이를 ‘라인(Line)’이라 칭한다. 시의 한 행을 영어로 ‘Line’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패션쇼에 등장하는 수십 여벌의 옷은 모여 한 편의 시를 이룬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자기 자신을 돌보고, 배려하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고, 자기 자신에게서 기쁨을 찾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을 자기 테크놀로지의 주요 덕목으로 봤다. 패션은 자기(self)를 만들고 배려하는 기술이다. 글쓰기의 핵심이 자기 탐색과 확장에 있듯, 패션도 그렇다. 패션 스타일링도 글쓰기의 확장이다. 글을 쓰며 사람들은 인문학적 성찰의 렌즈로 자신을 바라본다. 지금 살아가는 이 체제에 그저 동화되거나 포섭되지 않도록 ‘생각하며 살아가기 위한’ 비평적 거리를 유지한다. 우리의 옷차림도 이런 의지의 표명이다. 패션이 시스템이 밀어붙여서 만들어낸 각종 ‘트렌드’의 산물만은 아닌 것은, 유행의 체계 안에서 유행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를 지켜가는 각 개인들의 쿨(Cool)함이 지속적으로 트렌드 지향적 사회의 내면과 긴장을 이루며 균형을 잡기 때문이다.

표절과 복제는 한 개인의 옷차림을, 한 디자이너의 생각과 사유를 대량으로 찍어내는 시스템의 조각으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그것은 패션의 동력인 ‘트렌드’가 되고 사회의 ‘핫’한 아이템이 된다. 하지만 ‘트렌드’를 나만의 감각으로 소화하며 세상과 거리감을 유지할 ‘쿨’한 ‘개인’을 지워버린다. 우리에게 표절이 슬픈 이유다.

김홍기·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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