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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지친 당신, 옆자리 동료 한번 바라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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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지친 당신, 옆자리 동료 한번 바라보세요

입력
2016.04.15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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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뤼겔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뤼겔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너무 성실해서 아픈 당신을 위한 처방전’이라니. 이런 달달한 제목이라니. 이런 자기애가 풀풀 넘치는 제목이라니. 스스로 성실해서 아프다고 말하지 않을 이 얼마나 될까. 달달한 제목치곤 의외다. 처방전이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이라서다.

이 그림은 그림만 봐서는 뭐가 추락하는지 모를 풍경이라 유명한 그림이다. 이카로스를 찾기도 어렵다. 보여주는 거라곤 허우적대는 뒷다리뿐이니 말이다. 더구나 그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질 않는다. 밭을 가는 농부, 양을 치는 목동, 낚시하는 낚시꾼, 오가는 배. 나른한 햇살 아래 모두들 묵묵히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비극적 영웅의 최후라는 것이 최후를 맞이하는 영웅에게나 비극적인 일일 뿐, 밭이나 바닷가에서 먹고 사는 하층민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사건’으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 비극적 영웅은 자신의 과도한 열정의 대가를 그렇게 온전히 홀로 짊어지고 사라질 뿐이다.

벨기에 철학자 파스칼 샤보가 내놓은, ‘번아웃 신드롬’을 위한 처방전은 이토록 한편으론 익살스럽고 한편으론 이렇게 냉혹하다. 나처럼 이렇게 일에 열의를 가지고 성실하게 잘 해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이들에게 샤보는 ‘당신이 바로 이 이카로스요’라며 싱긋 웃어주는 셈이다.

번아웃이란 단어는 불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어떤 열정을 의미하는 ‘내면의 불’은 나쁜 게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선택 받은 자들의 특권이자, 그들의 열정과 권력의 비밀스러운 원천”이었고 “인간이 정화와 계시를 통해 신을 영접하는 매개”였다. 그렇기에 이 내면의 불은 원래 종교인, 예술가 등 소수의 특출한 이들에게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현대사회 들어서는 모든 현대인들의 가슴에 옮겨 붙었다. 이 내면의 불은 참으로 변신에 능해서 언제 어디서든 이름을 바꿔 달고 나오는데, 산업역군을 거쳐 신지식인에 이어 요즘은 창조…경제던가?

그러면 남는 것은 이제 태양을 외면한 채 묵묵히 밭을 갈고, 양을 치고, 낚시를 하는 것 뿐인가. 한동안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말을 남발하던 필경사 바틀비를 유럽 급진 철학자들이 대안처럼 거론하고 남달리 유행에 빠른 우리 지식인들이 잽싸게 받아들여왔지만, 정작 이들이 밝히지 않은 사실은 바틀비가 결국 굶어 죽었다는 점이다. ‘우리에겐 빚이 있다’는 쓰디쓴 현실 말이다. 이카로스의 죽음에도 고개 조차 돌릴 여유가 없던 농부와 목동과 낚시꾼도, 아마 땅이나 양 보증 대출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협약과 균형’이다. ‘내면의 불’은 홀로 줄일 수 있는 게 아니다. 다 함께 나서야 한다. 오늘날 노동 현장에 있는 이들은 이카로스 코스프레일랑 잠시 접어두고, 빚의 힘으로 일하는 옆자리 동료의 손을 잡아줘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샤보는 고대 연금술에서 ‘카우나 파보니스’라는 말을 빌려왔다. 뜻은 책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하기사 프로이트도 ‘문화의 불안’에서 불에 타거나 불을 끄는 게 아니라, 불을 잘 가지고 노는 것이 결국 문명이라 하지 않았던가.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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