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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는 합리성이 넘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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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는 합리성이 넘쳐 일어났다

입력
2015.02.0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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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원정길 유대인은 척결 대상, 중세이래 유럽서 격리·혐오 비일비재

나치, 소련에 대승 후 절멸정책 본격화

과학기술과 관료제의 합작품, 유럽 1500만명 유대인 분류·등록

한 나치 군인이 1943년 4월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 유대인을 강제로 수용하며 신체를 검열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한 나치 군인이 1943년 4월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 유대인을 강제로 수용하며 신체를 검열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영국 유학 시절 가족과 함께 요크시를 둘러보다 언덕 위에 불쑥 솟은 클리퍼드 성에 들어가기에 앞서 무심코 안내판을 읽다가 몸이 굳어버렸던 일이 있다. 폭도에게 학살 당할 위기에 빠진 요크의 유대인 150여명이 1190년 3월 16일 금요일 밤에 자결한 곳이 바로 이 자리라는 것이었다.

중세 영국에서는 도시라고 해도 인구가 천명 단위인 경우가 허다했으니, 150명은 매우 큰 숫자다. 더군다나 그 150여명이 요크의 모든 유대인이었다니, 한 특정 집단의 씨가 마른 셈이다. 이 사건은 영국 국왕이 제3차 십자군에 가담할 채비를 하면서 거세진 유대인 혐오 정서가 불러일으킨 참사였다.

유럽의 오랜 유대인 혐오…전시엔 대학살로

유대인 미워하기는 유럽에서 무척 오래된 현상이다. 가톨릭 교회도 그랬지만, 종교개혁 주도자인 루터는 유대인을 극도로 싫어했다. 샤일록을 피도 눈물도 없는 자로 묘사한 ‘베니스의 상인’에서 알 수 있듯이 셰익스피어도 유대인을 미워하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중세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 당국은 유대인이면 반드시 ‘다윗의 별’ 표를 가슴에 붙이고 다니라고 규정했고 유대인을 게토라는 비좁은 구역에 몰아넣어 일반인과 떼어놓았다.

이런 혐오 감정과 배제 정책이 전쟁 속에서는 대량 학살로 이어지곤 했다. 이교도의 손에 넘어간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뜨거운 열정에 취한 유럽인은 자기 고장의 이교도인 유대인부터 척결하겠다며 날뛰었고, 성지로 향하는 십자군의 이동 경로에 있는 유대인 마을은 으레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특정 집단을 학살해서 씨를 말리는 제노사이드가 전쟁과 맞물려 나타났다는 점도 제2차 세계대전의 한 특징이다. 흔히 집시로 불리는 로마니는 나치 당국의 손에 20만~50만명으로 추산되는 극심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 전쟁의 와중에 홀로코스트라는 낱말이 유대인 대학살을 일컫는 역사용어가 될 만큼 유대인은 참화를 입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독일에서 유대인을 괴롭히고 억누르는 정책이 실행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독일 사회에 이바지하던 관리, 학자, 예술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쫓겨났고 유대인이 소유한 재산은 약탈과 몰수의 대상이 되었다. 대낮에 두들겨 맞고 능욕을 당해도 유대인 남녀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대륙 제패 눈앞에 둔 나치 ‘절멸’ 구상

그러나 이런 사태는 사실상 정도의 차이뿐이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독일만 유별나게 유대인을 못살게 구는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적어도 20세기 초까지 유대인을 억누르기로 이름났던 프랑스나 러시아에 비하면 독일은 유대인이 그나마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곳이었다. 1912년 독일 총선에서 반유대주의 정당이 기록한 득표율은 겨우 0.6%였다.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인 히틀러가 독일의 최고 통치자가 된 뒤 기류가 확연히 바뀌고 유대인 차별이 공식 정책이 되었지만, 같은 시기에 미국의 흑인 차별과 독일의 유대인 차별에 질적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39년 9월과 독일국방군이 유럽 대륙을 석권하고 영국을 꼼짝 못하게 한 뒤 모스크바 코 앞까지 다가선 1941년 12월 사이에 나치의 유대인 정책은 질적 변화를 겪었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부는 독일만 통치할 때에는 독일 전체 인구의 1%에 못 미치는 50만명 안팎의 유대인을 배제나 추방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유럽 대륙을 제패하자 문제가 달라졌다. 유럽 전체에는 1,500만이 넘는 유대인이 있었다. 독일군이 점령한 폴란드에 있는 유대인만 해도 자그마치 200만명이었다. 독일 영토가 되는 것이 시간 문제로 보이던 러시아에는 그 몇 곱절의 유대인이 있었다.

지배 종족인 아리아인을 좀먹을 이 수많은 ‘해충’을 수용할 공간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추방한다는 구상은 현실성 없는 말 그대로 아이디어에 지나지 않았다. 나치 지도부는 히틀러의 의중을 헤아려 절멸을 기획했다.

한 남성이 1943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기아로 숨진 유대인들의 시체를 옮기고 있다. AFP연합뉴스
한 남성이 1943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기아로 숨진 유대인들의 시체를 옮기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틀 사이 약 3만4,000명 집단학살도

1940년 4월부터 폴란드의 여러 도시에 유대인을 격리 수용하는 게토가 설치되었다. 이 게토에 들어가는 식량을 독일 정부가 크게 제한해서 게토에 갇힌 유대인 5분의 1이 두 해 뒤에 굶어 죽었다. 전쟁 기간에 게토에서 죽은 유대인은 60만명으로 추산된다. 1941년 여름에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이 연전연승하면서 유대인 대책도 극단으로 치달았다. 발터 폰 라이헤나우 장군은 독일 군인이라면 “유대 열등인간에 대한 가혹하지만 정당한 조처의 필요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점령지 유대인 학살을 전담하는 특수부대까지 만들었다. 이 부대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임무를 수행했다. ①한 도시의 유대인을 모조리 몰아서 붙잡는다 ②붙잡은 유대인을 시골에 있는 구덩이로 끌고 간다 ③귀중품과 옷을 빼앗고 총으로 쏘아 죽인다 ④흙으로 구덩이를 덮는다 ⑤살아남은 유대인이 기어나오면 죽인다.

1941년 9월 우크라이나의 우만시에서 학살 작전에 가담한 한 독일군 대위는 이렇게 회고한다. “대원들이 자동 권총을 들고 줄지어선 유대인을 모조리 쏘아 죽였다. 젖을 빨고 있는 아기를 안은 여인도 이 끔찍한 고난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애 엄마는 제 아기가 그 작은 다리를 붙잡혀 권총 손잡이나 몽둥이로 한 방 얻어 맞아 죽은 뒤 구덩이에 있는 시체 더미에 내던져지는 끔찍한 광경을 피하지 못했다.”

독일군이 점령한 소련 영토 곳곳에서 이런 식으로 유대인이 한번에 수천, 수만 명 단위로 목숨을 잃었다. 바비 야르라는 곳에 있는 한 골짜기에서는 이틀 사이에 유대인 3만3,771명이 학살 당했다. 전쟁 기간에 학살 전담부대에게 죽은 유대인 수는 140만명으로 추정된다.

소련에게 거둔 대승에 도취된 나치 독일은 예전에는 구상에 머무르던 유대인 절멸 정책을 체계화했다. 1942년 1월 베를린 근교의 한 호수에 모인 나치당 수뇌부는 유럽의 모든 유대인을 수용소에 모아 “적절히 처리한다”는 이른바 ‘최종 해결책’을 의결했다. 수용소에서 유대인 일부는 곧바로 죽이고 나머지는 노동력으로 써먹다가 서서히 죽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 회동 뒤에 유대인을 수용해서 체계적으로 학살하는 절멸수용소가 동유럽 곳곳에서 운영되었다.

열등인종의 소멸을 필연으로 보는 우생학은 ‘과학’이므로, 그리고 유럽의 패권자가 되어 ‘모든 것 위에 있는 독일’을 실현한 히틀러는 초인이므로 윤리는 전혀 걸림돌이 아니었다. 수용소에서 죽은 유대인 수는 400만명으로 추산된다.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만 200만명이 희생되었다.

홀로코스트는 과학기술과 관료제의 산물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 자행한 이 끔찍한 유대인 대량학살은 난데없이 툭 튀어나온 돌발 사건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제노사이드는 유럽의 역사에 아로새겨진 유구한 반유대주의 전통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또한 제노사이드는 유럽에만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 20세기만 해도 튀르크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 시작해서 르완다 후투족의 투치족 대학살로 끝이 났다. 유대인 절멸은 인류의 역사에 드물지 않게 나타난 대학살의 하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의 홀로코스트에는 다른 제노사이드와는 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다른 대학살, 예를 들어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투치족 학살은 본질적으로 ‘원시적’인 방식으로 자행되었다.

반면에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합리성과 과학기술을 밑바탕 삼았다. 천만 명이 넘는 유럽인을 유대인으로 분류하고 등록해서 절멸수용소로 이송하는 일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고도의 행정력을 갖춘 현대국가의 관료 기구가 아니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작업이다. 하루에 수백, 수천, 심지어 수만 명을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취클론 B라는 맹독성 가스로 학살한 다음 그 엄청난 양의 시체를 대형 소각로에서 태워 재로 만들어 처리하는 일도 현대국가의 공업력이 아니면 꿈도 못 꿀 작업이다. 유대인 학살 과정을 ‘컨베이어벨트’에 비긴 한 나치 친위대 의사의 표현은 우연이 아니다. 컨베이어벨트야말로 근대성의 정수가 아닌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반유대주의 전통의 연장이자 그 정점이지만, 근대성의 성과인 고도의 과학기술과 효율성이 극대화된 관료 체제를 총동원해서 특정 집단의 절멸을 꾀했다는 점에서 지난날 유럽의 유대인 학살이나 다른 문화권의 제노사이드와 질적으로 다르다. 합리성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합리성이 흘러 넘쳐서 홀로코스트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바로 현대의 비극인 것이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ㆍ유럽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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