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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해봤자 바뀔 게 없다” 알제리 감싼 ‘무기력’

입력
2017.04.2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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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형 독재’ 18년 장기 집권

이슬람 정파들도 야당 역할 만족

아랍의 봄, 알제리만 비켜가

지난 대선 땐 투표율 23%P 하락

5월 4일로 예정된 알제리 총선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9일 수도 알제에 붙은 선거운동 벽보를 행인들이 지나치고 있다. 알제=AP 연합뉴스
5월 4일로 예정된 알제리 총선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9일 수도 알제에 붙은 선거운동 벽보를 행인들이 지나치고 있다. 알제=AP 연합뉴스

알제리 총선

“그대의 목소리를 듣는다.”

하원의원 462명을 뽑는 총선을 앞두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9일 알제리 거리에는 후보자 포스터와 함께 정부가 내건 새 구호가 나붙었다. 주요 방송에도 선거참여를 독려하는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마저 지난 2월 18일 국가 순교자의 날을 맞아 공식성명을 내고 “압도적인 투표율로 국민의 대리인을 뽑을 권리를 행사하길 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AFP통신이 전한 국민의 반응은 대체로 싸늘하다. 투표를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불능감이 팽배해 있다. 남편이 사망한 후 세 아이를 데리고 홀로 생계를 꾸리는 여성 파트마 조라는 “정치인들은 온갖 위대한 약속을 내걸지만 단지 그 때뿐”이라고 말했다. 조라는 오전에는 회사로 출근하고 오후에는 가정부로 일한다며 “투표할 시간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분석가 라치드 틀렘카니는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알제리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이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선출되고 나면 사라지는 후보들의 말을 믿을 만큼 유권자는 어리석지 않다”고 덧붙였다.

‘아랍의 봄’ 물결이 알제리서 멈춘 이유

알제리는 외형상 국민이 의회와 대통령을 선출하고 권력분립이 작동하는 민주주의 국가지만, 서구에서는 독재 국가로 분류한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가 작성하는 ‘데모크라시 인덱스’에서 알제리 민주주의의 점수는 10점 만점에 3.95점. 매년 점수가 조금씩 오르는 추세지만 ‘불완전 민주주의’에도 못 미친다.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1999년 집권한 이래 4선에 성공하며 무려 18년간 대권을 쥐고 있는 상태다.

튀니지의 벤 알리,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등 독재자가 차례로 쫓겨나간 2010~11년 ‘아랍의 봄’조차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권력에는 상처를 내지 못했다. 이는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통치가 부분적으로 결사, 집회,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고 다양한 집단이 의회정치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도록 허용하는 ‘관리형 독재’이기 때문이다. 부테플리카 정권은 외형상 세속주의를 표방하지만 이슬람주의를 수용하고 헌법에 종교에 대한 비난을 금하는 ‘신성모독 금지’ 조항을 추가했다. 이 때문에 이슬람주의 정파들도 반정부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보다는 의회 내에서 야당의 역할을 맡는 데 만족했다.

‘관리형 독재’의 기원은 1991년부터 시작된 알제리 내전이다. 사회주의 일당 독재 국가였던 알제리는 경제위기로 인해 1989년 민주제로 개헌했다. 첫 총선에서 이슬람해방전선(FIS)이 승리를 거두자 세속주의 성향의 알제리군이 개입했고, 내전이 벌어졌다. 2011년 이집트나 리비아에서 벌어진 일들이 이미 20년 전 알제리에서 일어났던 셈이다. 10여년에 걸친 내전 동안 약 15만명의 희생자를 내고서 양 진영은 타협했다. 군 출신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2006년 무슬림 과격파에게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는 등 반대파의 불만을 조금씩 잠재웠다. 대표적인 이슬람주의 정당인 평화를 위한 사회운동(하마스)은 한때 부테플리카 정권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2016년 개헌은 이 ‘권력 나누기’의 최신 사례다. ‘거수기’에 불과했던 의회의 권한을 일부 확대하고, 410명으로 구성된 독립된 선거감시기구를 설치해 ‘불공정 선거 논란’을 불식시키려 했다. 독립 선거감독 고위기구(HIISE)의 압델와합 데르발 대표는 이번 총선에 유럽연합(EU) 아프리카연합(AU) 아랍연맹(AL) 이슬람협력기구(OIC) 등의 참관인 파견을 허용했다고 밝혔다. 제한이 없었던 대통령의 연임도 1회로 제한했다.

‘아랍의 봄’ 직후 알제리에서 저항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알제리인들은 대체로 내전을 끝내고 화해와 안정을 확립한 부테플리카 정권에 우호적이었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참혹한 내전을 겪은 알제리인들이 정권을 무너트려 불안정한 미래로 뛰어들기보다는 독재 정권 하에서의 안정을 선택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알제리인들의 우려는 이웃 국가에서 현실이 됐다. ‘아랍의 봄’이 정부를 전복한 리비아는 전화(戰火)에 휩싸였고 이집트는 독재로 회귀했다. 시리아도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뒤집기 위해 개시한 운동이 내전으로 이어져 국토가 초토화됐다.

2014년 4월 17일 4선에 도전한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알제리 대통령이 의자에 앉아 투표권을 행사하고 있다.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4선 승리로 총 19년 동안 최고권력자 자리를 지키게 됐다. 로이터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4년 4월 17일 4선에 도전한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알제리 대통령이 의자에 앉아 투표권을 행사하고 있다.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4선 승리로 총 19년 동안 최고권력자 자리를 지키게 됐다. 로이터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치 일반에 대한 실망 속 “참여해야 바꾼다” 목소리도

사실상의 독재이긴 해도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인기가 높았고 선거에서 항상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해 왔다. 그러나 2014년 4월 그의 네번째 대선은 분위기가 달랐다. 5년 전 3선 때는 74.5%였던 투표율이 51.7%로 급전직하했다. 투표자 중 압도적 다수가 부테플리카 대통령과 집권당 민족해방전선(FLN)ㆍ민족민주연합(RND) 진영에 표를 던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투표율의 하락은 곧 득표수 하락을 의미한다. 2009년 대선에서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1,290만여표를 얻었다. 2014년에는 833만표로 떨어졌다. 무려 400만표를 잃었다.

타예브 벨라이즈 내무장관은 “투표율 하락은 전세계적 추세”라고 주장했지만 5년만에 400만명이 투표를 포기했다는 것은 심상찮은 징조다. 중동 정치분석 전문사이트 알모니터는 부테플리카 집권 3기 내내 사회 불안정이 심화됐고 경제가 어려워졌으며 특히 부테플리카 대통령 본인의 건강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고 지적했다. 201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대선 재출마를 강행했지만 현재는 대외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올해 2월에는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기관지염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알제리 방문을 취소하기도 했다.

17일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시리아 독립 71주년을 맞아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에게 축전을 보내면서 “알제리 민족과 정부를 대변해”라는 문구를 쓴 것도 논란이 됐다. SNS에는 “내 이름으로 발언하지 말라(pas en mon nom)”는 해시태그가 유행했다.

부테플리카 정권에 불만이 많은 유권자들이지만 그렇다고 야당에 표를 던지지도 않는다. 주요 야당은 의회선거 자체가 사기라고 주장하면서도 부테플리카 정권에 부분적으로 영합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마스를 비롯한 이슬람주의 정당들은 이전까지만 해도 부테플리카 정권의 파트너였으나 2011년부터는 ‘아랍의 봄’ 바람을 타고 야당 노선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슬람 정당과 부테플리카 정권의 협력관계를 알고 있는 알제리 유권자들은 이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세속주의 야당들은 불공정 선거를 보이콧하는 것이 옳은지 참여하는 것이 옳은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양새다.

물론 선거가 공정하지 않다는 지적은 1999년 다당제 민주화 이래 계속해서 제기돼 왔다. ‘르수아르 달제리(알제리의 저녁)’의 타렉 하피드 기자는 중동 전문매체 ‘미들이스트아이’에 “정부가 피선거인 명단을 조정해 집권당에 많은 의석이 돌아가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 의하면 선거 결과는 사실상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마스 소속 활동가 카림은 “집권당 FLN과 친정권당 RND가 다수연합을 형성할 것은 뻔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부테플리카 대통령마저 얼굴마담일 뿐 실권은 군부에 있다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이번 총선에도 야권의 대응은 엇갈렸다. 하마스와 사회주의자전선(FFS) 등은 선거에 참여한다. 하마스의 당수 압델라자크 마크리는 “알제리인들이 정치ㆍ사회운동 지도자 없이 거리로 나설 경우 재앙이 발생한다. 이를 막기 위해 선거에 나서는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가장 유력한 야권 인사로 꼽히는 알리 벤플리스의 ‘탈라이우 알후리앗(국민선봉대)’과 ‘질자디드(새로운 세대)’ 등은 불참한다. 마크리는 총선 불참을 선언한 질자디드의 대표 수피안 질랄리와 SNS에서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지를 놓고 충돌하기도 했다.

야당 지지 유권자들 가운데서도 투표를 하는 편이 낫다는 입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 운동가 모하메드는 AFP에 “여당의 지지자들은 투표할 것이다. 만약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 역시 투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여당과 야당을 가리지 않고 정치권 일반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하원의원의 높은 급여와 면책특권, 대통령을 상대로 유의미한 저항을 하지 못하고 되레 영합한 역사, 후보직을 매매해 정당의 재정을 확충하는 행태 등이 정치실망의 주원인으로 꼽힌다.

2016년 개헌으로 대통령 연임 제한이 도입됐지만 소급적용이 되지 않기에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2019년 대선에도 출마할 수 있다. 측근들 가운데서는 5선 도전을 언급하는 이들도 있지만 건강 문제로 인해 차세대 지도자를 내세워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어느 때보다 불안정한 부테플리카 정권 입장에서는 의회 내로 순치된 야권 진영과 ‘국가 통합’ 정부의 구성,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국민 여론이 절실하다. 이 때문에 알제리 정부는 더 많은 국민을 투표장에 불러내려 애쓰고 있지만,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을지는 미지수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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