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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동네에 스며든 오래된 새로움, 익동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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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동네에 스며든 오래된 새로움, 익동다방

입력
2016.04.17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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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동다방 입구를 알리는 노란색 철제 구조물. 서울 종로구 익선동은 인근 서촌과 북촌이 차례로 주목받는 동안에도 재개발에 묶여 낙후를 거듭했다. 지난해 익동다방이 들어선 이후 젊은이들의 거리로 급부상했다. 익선다다 제공
익동다방 입구를 알리는 노란색 철제 구조물. 서울 종로구 익선동은 인근 서촌과 북촌이 차례로 주목받는 동안에도 재개발에 묶여 낙후를 거듭했다. 지난해 익동다방이 들어선 이후 젊은이들의 거리로 급부상했다. 익선다다 제공

젊음의 가치를 아는 것이 늙음 뿐이듯, 낡음의 아름다움도 늘 새 것에게만 포착된다. 서울 한복판, 보존과 복원이란 단어에서 소외된 거의 유일한 동네 익선동이 최근 변화의 중심에 놓였다.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내세운 카페와 펍, 레스토랑, 공방이 100년 묵은 한옥 옆, 혹은 그 한옥을 리모델링해 들어서고 있다. 변화의 진원지는 공간기획자 박한아, 아트디렉터 박지현이 오래된 한옥을 고쳐 문을 연 익동다방이다. 2014년 여름 처음 익선동 골목에 발을 디딘 이들의 눈에 다 쓰러져가는 이 골목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고 한다.

1930년대 그대로, 낡음이 아름다움이 되다

“익선동은 1920, 30년대 조성된 한옥단지가 지금까지 이어진 유일한 동네예요. 주민들이 땜질하듯 조금씩 개보수한 것 외엔 장독 놓는 터라든지 실외 화장실 같은 근대식 생활 시스템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박한아)

낙원상가 뒤편 실핏줄처럼 좁은 골목으로 연결된 익선동은, 구석구석 낡은 종로에서도 가장 낡은 동네에 속한다. 오래 돼 비가 새는 지붕은 방수천으로 대충 덮어 묶었고, 담장 에 보안용으로 박아 놓은 철심들은 녹이 잔뜩 슬어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다. “주인이 아닌 세입자들이 사는 집이 대부분이에요. 여기가 2004년에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됐거든요. 언제 동네를 쓸어버릴지 모르니 주인들은 집을 싸게 세놓고, 세 들어온 사람들은 아무리 불편해도 수리에 1,000원 한 장 들이기 아까워 참고 산 거죠.” (박한아)

익선동의 오래된 한옥집을 리모델링해 만든 익동다방. 정면의 반쯤 무너진 돌담은 옛 장독대가 놓였던 터다. 익선다다 제공
익선동의 오래된 한옥집을 리모델링해 만든 익동다방. 정면의 반쯤 무너진 돌담은 옛 장독대가 놓였던 터다. 익선다다 제공
익동다방의 마당. 오래된 한옥을 가능한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내부 인테리어에 집중했다. 낡은 담과 샛노란 철제 구조물이 이질적인 듯 잘 어울린다. 익선다다 제공
익동다방의 마당. 오래된 한옥을 가능한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내부 인테리어에 집중했다. 낡은 담과 샛노란 철제 구조물이 이질적인 듯 잘 어울린다. 익선다다 제공

두 사람은 인근의 정갈하게 복원된 한옥마을보다 늙고 지친 맨 얼굴의 익선동에 매료됐다. 이들을 움직인 건 단순히 흥미만은 아니다. 현재 재개발 지정 해지단계에 있지만 주거지역인 북촌, 서촌과 달리 익선동은 상업지구다. 누구나 들어와 기존의 한옥을 밀어버리고 가게를 열 수 있는 상황에서 동네가 어떻게 바뀔 지가 “눈에 훤히 보였다”고 한다.

“할머니 댁에 온 것 같은 느낌의 거리가 서울에 몇이나 남아 있겠어요. 흔치 않은 근현대 건축양식이 어떻게 망가질 지 너무 뻔하니까 안타까웠어요. 어차피 상업화될 곳이라면, 왜 이 거리가 지켜져야 하는지에 대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곳들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박지현)

생각이 커지자 인원도 늘었다. 두 사람은 ‘익선다다’라는 팀을 만들어 거리 만들기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사 갈 집들을 물색하고 매장을 기획해 운영자를 찾는 일이 시작됐다. 그 1호가 익동다방이다. 익선동 후미진 골목 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자리한 수십 년 된 한옥이 낙점됐다. 마당을 합쳐 20평이 안 되는 이 집엔 모녀와 대형견 두 마리가 공사하기 얼마 전까지 10년 넘게 세 들어 살았다고 한다. 인근 한옥들과 마찬가지로 집 상태는 심각했다. 비가 새는 건 물론이고 흙벽이 기울어 자칫 붕괴할 위험도 있었다. 마당을 통해야 나갈 수 있는 부엌은 창고로 방치된 지 오래고, 화장실은 불도 안 켜지는 상태에서 수년 간 사용하고 있었다. “뜯어낸 벽지만 10겹”이란 말에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 없었다.

리모델링하기 전의 모습. 지붕엔 물이 새고 화장실에 불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노후한 상태였다. 익선다다 제공
리모델링하기 전의 모습. 지붕엔 물이 새고 화장실에 불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노후한 상태였다. 익선다다 제공
바뀐 후의 모습. 안전상의 문제만 해결하고 크게 바뀐 게 없다. 문만 새 것으로 바꿔 달았다. 익선다다 제공
바뀐 후의 모습. 안전상의 문제만 해결하고 크게 바뀐 게 없다. 문만 새 것으로 바꿔 달았다. 익선다다 제공

열기가 식은 후…”익선동은 익선동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은 건축가나 시공사 없이 직접 리모델링을 하기로 했다. 첫째 이유는 “돈이 없어서”였다. “인테리어 업체에 맡기자니 돈도 부담스러웠지만, 저(박현아)는 공간기획자로 공사 경험이 있고 박지현씨도 공간 디자인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끼리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나중에야 불필요한 자신감이었다는 걸 알았죠.(웃음)”

리모델링의 핵심은 ‘보존’으로 잡았다. 처음 두 사람이 반했던 동네의 낡음을 최대한 해치지 않기 위해 외부 골조는 그대로 두고 인테리어에 집중했다. 미닫이 문으로 분리돼 있던 내부를 시원하게 트고 창고로 쓰이던 부엌 벽에 큰 유리를 달아 오픈 키친으로 쓸 수 있게 했다. 마당 장독대를 둘러싼 돌담은 공사 내내 위태위태하다가 결국 일부가 무너져 내렸지만 치우지 않고 그대로 뒀다. 허물어지다 만 돌담은 제법 운치 있는 야외 장식이 됐다.

서까래를 가린 천장을 뜯을 땐 특히 긴장했다. 서까래가 부러져 있기라도 하면 공사 비용이 대폭 올라가기 때문이다. 다행히 목재는 멀쩡했지만 안을 채운 흙이 몽땅 썩어서 새 걸로 바꾸고 하얗게 회칠해 마감했다. 결국 바꾼 것은 너무 낡아 쓸 수 없게 된 문뿐이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신축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이 집도 1920, 30년대에 지어졌을 거예요. 당시 유행했던 한옥 창호 디자인을 조사해서 그걸로 바꿔 넣었어요.” (박지현)

익동다방 내부. 카페 겸 전시공간으로, 하얀 가벽 위에 빔 프로젝트를 쏘아 영상전시 등을 연다. 익선다다 제공
익동다방 내부. 카페 겸 전시공간으로, 하얀 가벽 위에 빔 프로젝트를 쏘아 영상전시 등을 연다. 익선다다 제공

익동다방에서 출발한 익선다다의 프로젝트는 지난 1년 간 햄버그스테이크를 파는 ‘경양식 1920’, 수제햄과 수제맥주 등 수제 음식 매장 7개가 모인 ‘열두달’, 연탄불에 쥐포와 먹태를 구워주는 슈퍼마켓 ‘거북이슈퍼’ 등으로 확대됐다. 트렌디하면서 동네의 노후함과도 충돌하지 않는 이 매장들은 금세 입소문을 탔고, 익선동은 가로수길-경리단길-서촌을 잇는 젊은이들의 거리로 부상했다.

“동네가 바뀐 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걱정을 해요. 젠트리피케이션(구도심이 번성하면서 임대료가 올라 원주민이 쫓겨나는 현상)이 아니냐는 거죠. 그런데 익선동은 성격이 좀 달라요. 여기서 태어나 터를 잡고 산 게 아니라 집세 때문에 내몰리듯이 온 사람들이 많고, 우린 나가기로 한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최대한 그곳을 보존하며 재미있는 걸 해보려는 거예요. 오히려 젠트리피케이션의 첫 피해자가 생긴다면 우리가 되겠죠.” (박한아)

지금 두 사람이 생각하는 건 수년 후의 익선동이다. 이들은 동네가 번화함에 따라 닥쳐올 일들에 담담하게 대처하려고 한다. “거리에 변화를 일으켰다고 해서 이 거리가 우리 것은 아니에요. 임대료가 오르고 대기업이 들어오면 그건 막을 수 없는 일이죠. 다만 그 전에 거리의 정체성을 다지고 싶어요. 가령 테일러숍이 들어온다면 전면 유리를 내기 위해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대신 손바닥만한 쇼윈도를 만들어 나비넥타이만 진열하는 거죠. ‘여기선 그런 식의 매장도 가능하다’는 걸 증명하면 나중에 대기업이 들어와도 이곳이 보존될 수 있지 않을까요?” (박한아)

열기는 식고 유행은 바뀐다. 익선동은 그 후에도 익선동으로 남을 수 있을까. 익선다다의 올해 프로젝트는 여기에 집중될 예정이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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