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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테이에서 온 편지] 책이 피아노와 첼로 선율 되어 숲을 울릴 때

입력
2017.03.3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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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 숲속작은책방 주인장 백창화(오른쪽), 김병록씨 부부가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충북 괴산 숲속작은책방 주인장 백창화(오른쪽), 김병록씨 부부가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책에 관해서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이제 고작 초등학생인데 글만 빽빽한 두꺼운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아이. 헤겔, 라캉, 데리다 등을 원서로만 1,000권이 넘게 소장하고 있다는 전문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매일 한 권 이상의 책을 읽는 건 물론이거니와 매일 한 편씩 독서일기를 쓰고 있다는 젊은 주부. 여고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해 중견 직장인이 된 40대 워킹맘은 1년 전 사내 독서 동아리에 가입하고 나서 비로소 독서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고, 그 이전에 책이란 건 읽어본 적이 없었노라 말하면서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했다.

어쩌면 ‘북스테이’를 하지 않았다면 내 삶의 길목에서 우연하게라도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 같은,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들. 어떤 이들에게는 내 인생의 책을 전해주고, 어떤 이들로부터는 그들 인생의 책을 전해 받는다. 하룻밤 함께 나눈 그이의 지극한 추천이 아니었다면 평생 들춰 보지 않았을 것 같은 책이 나의 목록에 오르기도 하고, 반대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들고 간 나의 추천 도서가 그의 밤을 하얗게 지새우게도 한다. 그러나 모든 책 추천이 100% 승률을 자랑하는 건 아니어서 서로가 추천도서를 교환한 날 밤 ‘음, 이것은 타인의 취향이군’ 하며 슬쩍 책을 내려놓는 순간들도 있다.

그럼에도 ‘좋은 글이란 우리 시각과 미각, 청각 등 오감을 건드리는 글이며, 문학이란 이런 감각의 향연’이라고 하셨던, 은퇴한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한다. 그분의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책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라는 소설이었다. 그 책을 소개한 이는 3개의 북클럽에 참여하고 있다는 영어 강사였는데 나와 독서 취향이 어찌나 비슷한지 밤이 늦도록 책 이야기를 끊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당장 책을 주문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ㆍ2

앤서니 도어 지음ㆍ최세희 옮김ㆍ민음사 발행

각권 321쪽 464쪽ㆍ각권 1만3,500원, 1만4,500원

첼로, 노래하는 나무

이세 히데코 지음ㆍ김소연 옮김

천개의바람 발행ㆍ40쪽ㆍ1만2,000원

그의 추천처럼 소설은 너무나 애잔하고 아름답다. 눈이 보이지 않는 열여섯 살 프랑스 소녀와 열일곱 살 독일 소년병사, 전혀 관계가 없는 먼 곳의 인연이 전쟁터에서 라디오라는 운명의 전파를 타고 하나로 얽혀 들어가는 신비한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지금껏 그랬듯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제 음악이 있다.”

여덟 살에 고장난 라디오를 고쳐 오케스트라를 처음 듣게 된 소년의 감동이 책을 읽는 내내 피아노 선율에 실려 오고 소설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드뷔시의 ‘월광 소나타’가 귀에 감겼다. 그 후로 이 책을 추천할 때는 꼭 ‘월광’을 틀어놓고 읽어보시라 권하게 되었다. 전쟁, 소년과 소녀, 둘을 이어주는 피아노 음악. 소재만으로도 문학적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충만한데 단문으로 끊어 쓰고 단락을 짧게 짧게 이어가는 서술 방식이 피아노 현을 내리치는 해머의 움직임처럼 우아하고 경쾌하게 느껴진다.

좀 더 즉각적으로 오감을 자극하면서 책 속의 글과 그림이 고스란히 선율로 변화되어 다가오는 책이 ‘첼로 노래하는 나무’라는 그림책이다. 일본 작가 이세 히데코의 맑은 수채화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서정적인 그림책이다.

소년은 숲에서 새들의 옹알이를 들으며 컸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숲에서 나무를 키우는 일을 했고 아버지는 그 나무로 바이올린과 첼로를 만들었다. 아버지가 완성된 첼로를 들고 연주가 파블로씨의 집을 찾았을 때 새 첼로를 켜보던 파블로씨는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

“숲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소리야.”

이 첼로로 파블로씨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에서 소년은 자신이 숲에서 들었던 바람 소리, 흐르는 강물 소리, 작은 새들의 날갯짓 소리를 듣는다. 숲에서 베인 나무는 이제껏 자기가 보거나 들은 것들을 악기가 되어 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아들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삶의 고리를 돌아 책을 보는 내 귓가에는 파블로 카잘스가 흘러 넘치는 것만 같다.

책은 단지 물건이 아니다. 그저 종이 위를 찍고 지나간 인쇄기의 흔적이 아니다. 책은 살아있다. 살아서 펄펄 뛰는 심장을 내 무릎 위에 털썩 던져주기도 하고, 어느덧 낭랑한 시인의 음성을 들려주기도 하며, 깊은 숲 속을 스치는 바람의 진동, 건반을 누르는 해머의 잔향, 현의 떨림을 타고 들어오는 우주의 목소리를 전해오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위대한 걸작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종이뭉치일 뿐인 책 한 권이 오늘날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꾸고, 중독에 가까운 탐닉을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잠시 잠깐 집에서, 도서관에서, 서점에서 책을 읽는 것도 모자라 온통 책밖에 없는, 시골 외딴 마을의 책이 있는 집에 찾아가 밤새 책을 읽고, 다음날 아침이면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모르는 이런 추종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이렇게 온통 책에 미친 사람들, ‘책만 보는 바보’들의 마음의 고향이 바로 우리들의 공간, 시골 책방 북스테이다.

숲속작은책방 백창화 작가ㆍ북스테이 네트워크(bookstaynetw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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