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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3년, 일제 자본ㆍ가부장제와 맞선 무명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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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3년, 일제 자본ㆍ가부장제와 맞선 무명의 여성들

입력
2015.11.0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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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 일방을 바꾼 여성들의 역사

이임하 지음

철수와 영희ㆍ412쪽ㆍ2만2,000원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모든 권위와 주류의 경계를 허물고 자유를 추구하고자 한 68혁명의 정신을 응축한 구호다. 마음껏 사랑할 자유, 일상의 행복을 영위할 자유를 쟁취하는 것 역시 그 어떤 정치적 혁명 못지 않게 중하다는 취지다. 투쟁의 대상과 결은 다소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이 일상의 반란이 쏟아진 시기가 있다. 자유를 염원해온 조선인의 온갖 열망이 전국을 달군 3년간의 해방공간, 여성들로부터다.

‘해방공간, 일상을 바꾼 여성들의 역사’는 1945~48년 시기에 거리를 메운 무명의 여성 투쟁가들의 이름을 정성껏 불러낸 연구서다. 한국전쟁, 현대사, 여성사 등을 연구해 온 역사학자 이임하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가 수년간 신문, 잡지, 단행본 등을 조사ㆍ분석해 일제자본, 군국주의뿐 아니라 가부장제와 성차별에도 맞서야 했던 당대 여성 투쟁의 현장과 흐름을 차곡차곡 소개한다.

1945년 11월 부산의 국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노동자의 모습. 철수와영희 제공
1945년 11월 부산의 국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노동자의 모습. 철수와영희 제공

당시 폐허가 된 조국을 위해 국가건설에 이바지하라는 독려를 받은 대상은 남성뿐이 아니었다. 연일 적잖은 신문은 모자란 아이를 타이르듯 여성에게 외쳤다. “부엌에서 나와라. 민족이 부른다.” “현모양처에서 진화해 우족애국의 여장부를 요구한다.” “아장아장 걷는 맵시도 좋지만은 뚜벅뚜벅 걸어야 할 시대다.” 하지만 2~3년 만에 여론은 여성해방 담론에 대한 냉대로 돌변했는데, “(무턱대고) 아내가 남편과 대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는 사설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였다.

이 같은 척박한 상황 속에서 여성들의 활동과 반란은 이어졌다.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부녀총동맹의 전국부녀단체 대표자 대회를 시작으로 여성해방을 위한 좌담회, 대회 등이 거듭됐다. 공장가에서는 일제식 규율에 항거하는 파업이 터져 나왔다. 파업의 여파는 홍등가로 번져 소위 기생들이 자신들을 모조리 성판매 여성으로 치부한 미군정의 강제 성병검사를 거부하는 집단행동으로 이어졌다. 책은 여성들의 저항과 함께 여성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된 국가기구의 관료적, 권위주의적 면모를 펼쳐 보인다.

1948년 8월 서울의 한 공장에서 노무화(노동할 때 신는 신발)를 만드는 여성노동자들의 모습. 철수와영희 제공
1948년 8월 서울의 한 공장에서 노무화(노동할 때 신는 신발)를 만드는 여성노동자들의 모습. 철수와영희 제공

이 교수는 당대 여성 운동에 대해 “좌익 여성 활동가들은 헌신적으로 활동했지만 여성운동의 독자성, 유연성을 유지하지 못했으며, 우익 여성 활동가들은 독립전취 외에 어떤 전망도 내놓지 못한 채 이 과제가 실현되자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요구에 쉽게 포섭당했다”고 평가했다. 여성들의 일상의 실천이 산발적으로 쏟아 나와 미군정을 긴장시킬 정도였지만, 탄탄한 이론이나 단체운동으로 발전해나가진 못했다는 분석이다.

책은 이처럼 여성운동의 도전사와 함께 좌절의 이면을 다룬다. “자학사(史)는 그만”을 외치는 게 능사는 아닌데다, 이런 분석을 통해서만 여성운동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찬란한 과거만 기억하자는 이들에게 이 교수가 던지는 경고는 묵직하다.

“자학사라며 그만하자는 주장은 기록하고 분석하고 해석해야 할 역사 자원을, 그리고 그 자원을 토대로 한국 사회의 전망을 내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는 것과 같다. 비극이 희극보다 생명이 긴 까닭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기 대문이다. 희극은 한바탕 웃으면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지만, 비극은 인간의 존재ㆍ가치ㆍ삶을 고민하게 만든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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