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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박에 내 아이를 찾아낼 수 있을까

입력
2015.09.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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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귀할멈 헥커디 펙’ 오드리 우드 글, 돈 우드 그림

가난한 홀어머니와 일곱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의 이름은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시장가는 길에 말했다. “원하는 물건을 말하면 사다 주마” 월요일은 버터를, 화요일은 주머니칼을, 수요일은 도자기 주전자를, 목요일은 꿀단지를, 금요일은 소금을, 토요일은 크래커를, 일요일은 달걀푸딩을 원했다. 네 가지는 납득이 됐지만 세 가지가 의아했다. 도자기 주전자와 소금과 버터라니, 어린이가 원하는 물건이라기엔 안 어울리게 실용적이다. 일곱 아이들과 일곱 물건. 수수께끼 같은 도입부에 확 끌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어머니는 낯선 이를 집에 들이지 말고 불을 만지지 말라고 당부했다. 오른쪽 다리에 나무 의족을 한 마녀 헥커디 펙이 나타나 창문을 두드렸다. 헥커디 펙은 아이들에게 집에 들어가 담뱃대에 불을 붙이게 해 달라고 했다. 아이들은 한 번은 거부하지만 결국 어머니의 당부를 어기고, 헥커디 펙은 아이들에게 마법을 걸어 음식으로 변하게 한다. 월요일은 빵, 화요일은 파이, 수요일은 우유, 목요일은 죽, 금요일은 생선, 토요일은 치즈, 일요일은 갈비구이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을 구하러 오두막으로 찾아온 어머니에게 헥커디 펙은 말했다. “단 한 번에 누구인지 알아맞히지 못하면 아이들을 모두 먹어버릴 테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원하던 물건들을 떠올리며 어떤 음식이 어떤 아이인지 한 번에 알아맞힌다. 그리고 이어지는 권선징악과 해피엔딩.

어머니의 당부를 어긴 일곱 아이들이 일곱 가지 음식으로 변하는 판타지를 환상적으로 그려냈다.
어머니의 당부를 어긴 일곱 아이들이 일곱 가지 음식으로 변하는 판타지를 환상적으로 그려냈다.

참 실용적인 그림책이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원하는 물건을 사다준다고 한 이유는 아이들이 집안일을 잘 도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마녀에게 잡아먹힐 뻔한 위기에 빠진 것은 황금의 유혹에 빠져 어머니의 당부를 어겼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잡아먹으려던 나쁜 마녀는 결국 응징된다. 어린이에게 교훈을 주기에 딱이다. “집안일 좀 도와라” “엄마 말 안 들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나쁜 짓 하면 벌 받아요” 따위의 엄마표 잔소리를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스리슬쩍 감춰놓았다.

뻔하게 들릴 수도 있는 줄거리이지만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수수께끼 같은 도입부가 결말에 와서 보니 아귀가 딱 맞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쾌감이 있다. 덤으로 서양의 전통적인 식생활-빵에는 버터를 발라먹고, 파이는 칼로 잘라먹고, 우유는 도자기 주전자에 담고, 죽에는 꿀을 넣고, 생선은 소금에 절여먹으며, 크래커는 치즈와 함께 먹고, 갈비구이에는 달걀푸딩을 곁들이는-을 알게 되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민담이나 전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잔혹한 모티브를 암시해 강렬한 관심을 끌면서도 이야기의 구성으로 잔혹성을 중화시키는 부분도 흥미롭다. 마녀가 마법으로 아이들을 음식으로 변하게 한다는 설정은 ‘식인 모티브’의 잔혹성을 덜어낸다. 어머니가 헥커디 펙의 오두막 문을 두드리는 장면에서는 어머니의 다리가 잘릴 뻔한 위기를 꾀로 모면한다. 옛 이야기의 이득은 취하고 거부감은 줄였다.

아내 오드리 우드의 영리한 이야기에 남편 돈 우드의 그림이 결합해 고전적이면서 드라마틱한 그림책이 완성됐다. 깨알 같은 디테일이 생생하다. 일곱 아이들의 개성이 장면마다 살아있다. 모범적이던 아이들은 어머니가 집을 비우자 개구쟁이의 본색을 드러낸다. 일요일과 화요일이 거품 장난을 하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장면이 매력적이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고 아이들은 즐겁게 논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고 아이들은 즐겁게 논다.
벅찬 기쁨과 포옹의 와중에 자신이 원하던 푸딩을 퍼먹는 막내 일요일.
벅찬 기쁨과 포옹의 와중에 자신이 원하던 푸딩을 퍼먹는 막내 일요일.

헥커디 펙의 담뱃대에 불을 붙이는 장면도 재미있다. 한 명만 짚 오라기에 불을 붙여 와도 될 텐데 일곱 아이 모두가 흥분한 채 불 붙은 짚 오라기를 들고 설친다. 음전했던 월요일마저도 금기를 깨는 쾌감을 만끽하고 있다. 마법이 풀려 사람으로 되돌아와 서로 얼싸안는 장면에서는 아이들의 기쁨이 종이를 뚫고 나올 것 같다. 그 와중에 막내 일요일은 구석에서 달걀푸딩을 퍼먹고 있다.

가족과 친구들을 동원해 모델로 세워 장면을 연출한 뒤 그림을 그리는 돈 우드의 방식 덕에 생생한 표정이 나왔다. 어머니의 모델은 오드리 우드이고 헥커디 펙의 모델은 돈 우드 자신이다. 파이를 막 뜯어먹으려는 헥커디 펙의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운 표정을 연기하는 돈 우드의 사진을 보면 웃음이 터진다. 그림책으로 뭉친 이 사랑스러운 부부는 재미있게도 작업을 했다.

파이로 변신한 둘째 아이를 막 뜯어먹으려는 마녀 헥커디 펙(혹자는 이 얼굴을 보고 운하를 사랑하시는 어느 전직 대통령을 닮지 않았냐고 했다)과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헥커디 펙을 연기하고 있는 그림작가 돈 우드.
파이로 변신한 둘째 아이를 막 뜯어먹으려는 마녀 헥커디 펙(혹자는 이 얼굴을 보고 운하를 사랑하시는 어느 전직 대통령을 닮지 않았냐고 했다)과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헥커디 펙을 연기하고 있는 그림작가 돈 우드.

딸아이는 이 책을 참 좋아한다. 머리가 어느 정도 굵어진 후에 접해서 그런지,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엄마표 잔소리’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제 나름대로 흥미로운 요소에 집중한다. 그런데 이 책을 딸아이보다 내가 더 자주 꺼내든다. 자식을 키우는 어미의 가슴을 뜨끔하게 만드는 데가 있어서다.

‘마귀할멈 헥커디 펙’의 어머니는 아이가 일곱이나 되지만 아이들의 저마다 다른 요구에 하나하나 귀 기울였다. 마법에 걸려 음식으로 변할 때 아이들은 개성을 뿜어내 제각각 다른 음식으로 변한다. 아이들이 개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그것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머니가 일곱 아이들의 일곱 가지 요구에 “아이고 귀찮아, 품목을 좀 통일해 봐”라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이들이 모두 다른 음식으로 변하지 않고 단 두 명이라도 같은 음식으로 변했다면…. 아이들은 마녀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나는 아이가 일곱도 아니고 단 한명이다. 그런데도 가끔 딸아이의 개성을 누르려고 한다. 딸아이가 자신의 개성 때문에 혹시 세상에서 상처받을까봐 그냥 평균에 맞춰줬으면 할 때가 있다. 심지어 딸아이의 개성이 나 자신의 개성과 달라 불편해서 누르려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 딸아이가 세상이 바라는 틀에 맞춰 무난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을 품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부모라면 한 번씩은 고민하기 마련인 문제다.

“단 한 번에 누구인지 알아맞히지 못하면 아이들을 먹어버릴 테다” 마녀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단 한 번에 누구인지 알아맞히지 못하면 아이들을 먹어버릴 테다” 마녀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단 한 번에 누구인지 알아맞히지 못하면 아이를 먹어버릴 테다”라고 하는 마녀의 말은 그래서 섬뜩하다. 부모가 아이의 개성을 존중하지 못하고 아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아이는 세상에 먹혀버릴 수도 있다는 말로 들린다. 다른 어떤 모습으로 변한다 해도 내 아이를 알아볼 수 있을까? 딸아이가 세상이 바라는 것과는 다른 것을 원한다 해도 그것을 직시할 수 있을까? 미욱한 어미는 마녀가 무섭다.

김소연기자 au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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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신-‘마귀할멈 헥커디 펙’은 절판된 상태다. 이야기의 교훈적인 면에 주목했던 출판사가 ‘어린이 도덕 교육 시리즈’ 중의 한 권으로 1999년에 출간했다.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데 그마저도 미진한 부분이 있다. 줄거리의 전달에만 치중해 말맛을 살리지 못한 번역이 아쉽다. 의도적인지 몰라도 오역도 눈에 띈다. 헥커디 펙의 마법으로 목요일이 ‘죽’이 아닌 ‘꿀’로 변했다고 서술한 부분이다. 꿀단지를 원했던 목요일이 꿀로 변했다고 하면 너무나 쉬운 수수께끼 아닌가. 맥이 다 풀린다. 번역자가 이 그림책을 유아용으로 한정한 나머지, 원작의 일부를 변형시킨 셈이다. 영어로 쓰인 원작(‘Heckedy Peg’)을 읽으면서 아쉬움을 달래 본다. 어느 눈 밝은 편집자가 한글판으로 새롭게 출간해 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물론 원문을 살린 맛깔난 번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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