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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밥짓기] 삼식이 남편 둔 아내들 “나에겐 왜 정년퇴직이 없나” 분통

입력
2017.12.23 04:4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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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가부장적 인식과 충돌해

은퇴 후 아내 우울증 위험 70% 증가

5년 전부터 황혼이혼>신혼이혼

각자의 역할에 “수고했어” 인정이

원만한 부부관계 만드는 지름길

/그림 1밥 짓기 등 가사노동은 하루 온 종일 집에서 함께 지내는 은퇴부부가 겪는 황혼갈등의 주요 테마다. 게티이미지뱅크

김선화(가명ㆍ58)씨의 남편 박모(62)씨는 올해 3월 30년간 다닌 직장에서 은퇴했다. 퇴직 전에는 남편이 부산에서 근무해 일주일에 하루, 이틀만 서울 본가로 올라왔던 터라 남편의 식사를 챙겨주는 데 부담이 없었다. 하지만 은퇴 후 한 달 사이 갈등이 시작됐다. 평소 김씨는 약속이 많고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집에서 혼자 식사하기를 거부하는 남편 때문에 오후 6시면 귀가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꼭 다툼이 벌어졌다. “내가 없다고 해서 왜 식사를 못하냐고 따졌죠. 남편은 ‘내가 평생 일하고 이제 좀 쉬려는데 그거 하나 못해주냐’고 반박하더군요. 이젠 외출할 때 국, 반찬 세끼 정도를 준비해둬요. 남편이 혼자 챙겨 먹을 수 있게 타협을 본 거죠. 어쩔 수 없이 준비는 해두지만, 대체 왜 혼자는 못 해 먹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남편에게는 있는 정년퇴직이 왜 나에게는 없는 건지, 죽을 때까지 이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생각하면 시시때때로 분통이 터진다.

2016년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와 tvN의 ‘집밥 백선생’이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린 후 이른바 ‘요섹남(요리를 잘하는 섹시한 남자)’은 우리 사회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이제 TV에서 남자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장면은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거실 TV에서 고개를 조금만 돌려 각자의 집 주방을 바라보면, 그곳에서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낯설다. 아버지의 넥타이는 왜 앞치마로 대체될 수 없는 걸까.

“왜 밥 안 해줘?” vs “혼자서는 못 먹어?”

통계청이 9월 발표한 ‘2017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황혼이혼 건수가 연간 기준 처음으로 9,000건을 돌파했다. 황혼이혼이 신혼이혼을 앞지른 것은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이혼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내 생에 이혼은 없다’고 외치던 목소리도 작아지고 있다. 졸혼의 필요성을 수긍하는 사회분위기에서 배우자 은퇴 후 발생하는 가정 내 갈등은 곧장 황혼이혼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서울가정문제상담소 김미영 소장은 “삼식이 남편은 가부장적 의식이 행동으로 발현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꼬집었다. “현재 은퇴시기에 놓인 세대는 성 역할 고정관념이 남아있는 가부장적인 세대여서 퇴직으로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면 대리만족을 위해 가정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 받고 싶어 합니다. 남편이 삼시 세끼를 아내에게 당연하게 요구하는 행동은 부부관계를 수직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단지 식사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권위적으로 아내를 대하고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이미 갈등이 쌓여 있는 상태입니다.”

부엌의 중심에서 해방을 외치다

남성은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가정으로의 금의환향을 꿈꾸지만 여성도 가정 내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것은 마찬가지다. 아이를 키웠고, 무급으로 밤낮없이 집을 쓸고 닦았다. 여성도 쉼을 원한다. 바깥일 한다는 핑계로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던 남편에 대해 ‘이제는 도와주겠지’ 슬며시 기대도 품는다. 시간이 많아졌으니 젊었던 시절을 추억하며 데이트도 하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식탁에 앉아 있는 저 남자는 내 남편이 아니요, 차라리 직장 상사에 가깝다.

윤희옥(가명ㆍ61)씨는 입맛이 까다로운 남편 탓에 식사 준비가 괴롭다. “남편은 집밥을 좋아해요. 시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좋으셔서 입맛도 남들보다 까다롭죠.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잔소리를 하거나 아예 먹지를 않아서 식사를 준비할 때 다투는 경우가 많아요. 재료 하나 빠진 것에도 화를 낸다니까요. 스트레스를 받아서 위염까지 생겼어요.” 남편이 지난해 은퇴한 뒤엔 아침과 저녁, 두 끼를 차려준다. 남편의 은퇴로 집에서 식사하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스트레스도 늘었다. “까다로운 입맛에 맞추려고 내가 고생한 건 생각 안 하고 잔소리를 하면 너무 서운하죠. 힘들다고 말도 해봤지만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음식을 사와 시위를 벌이길래 마음을 비웠어요.”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과 연구팀이 2016년 발표한 45세 이상 남녀 5,900여명에 대한 조사 결과, 남편의 은퇴로 인한 아내의 우울증 위험이 70%까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룰 브레이커’가 돼버리는 남편 때문이다. 남편이 집안일에 잔소리를 보태고 간섭을 하기 시작하면서 수십 년간 아내가 정립해온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우리와 20년 차이로 비슷한 현상을 겪는다는 일본에서는 이미 1992년부터 퇴직한 남편을 둔 아내들의 우울증을 가리키는 ‘은퇴남편증후군’이란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통계청의 2016년 ‘한국의 사회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기혼여성이 음식 준비와 청소 등 가정관리에 214분을 썼던 1999년에 비해 2014년에는 그 시간이 189분으로 줄었다. 반면 기혼남성은 25분에서 38분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남성보다 5배가량 많은 실정이다. 이러한 기조는 50세 이상의 중년에서도 확인된다. ‘2014 생활시간조사’에 의하면 50대 여성의 가정관리 소비 시간은 188분, 60대 이상 여성은 192분에 달하는 반면, 50대 남성은 35분, 60대 이상 남성은 59분에 그쳤다.

“남편이 가끔 김치찌개나 어묵탕을 만드는데, 음식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배울 생각을 하진 않더라고요. 가끔 남편이 혼자 백종원의 삼대천왕 같은 요리 프로를 보면서 실험하듯이 요리를 하기도 하지만, 막상 내가 가르쳐 주려고 하면 신경질을 내요.”(최윤희ㆍ가명ㆍ57ㆍ경기 수원시) 아내 눈치 보는 남편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말은 오늘도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여성들에게 딴 나라 얘기일 뿐이다. 이들의 부엌에도 봄은 찾아올까.

“수고했어” 그 따뜻한 말 한 마디

“은퇴시기는 남녀 호르몬의 변화, 미래에 대한 정서적ㆍ경제적 불안 등 갑작스러운 변화가 안과 밖에서 한꺼번에 찾아오는 시기인 만큼, 부부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김미영 소장은 은퇴 후 원만한 부부관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서로의 수고를 인정하는 것’을 꼽았다.

앞만 보고 가장이라는 무게를 견뎌온 남편들에게 ‘은퇴’란 절벽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던 영웅에서 아내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삼식이로의 전락은 우울한 무력감을 불러일으킨다. 아내는 이러한 남편의 심리적 불안을 이해해주고, 사회에서 잃어버린 존재감을 가정에서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남편 역시 아내의 수고를 인정해야 한다. 남편이 사회생활에 몰두할 때 아내 역시 자녀 양육과 가사노동에 젊음을 바쳤다. 가장의 권위에 의지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것이 아니라, 아내를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아내와 가사를 분담하고 나아가 공통의 취미생활을 가지게 되면 보다 수월하게 가정생활에 적응할 수 있다.

“남편이 2016년 말에 은퇴해 퇴직한 지 1년이 되어 가요.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1년이 금방 지나간 것 같네요. 남편은 제 눈치를 보는 건지 집안일을 도와주려고 노력해요. 요리는 못하지만 청소는 많이 도와줘요. 사실 청소가 더 힘든 일인데, 그래서 전 오히려 편하고 고맙죠. 남편도 일하느라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더 쉬어도 괜찮은데’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서로 배려를 하니까 크게 갈등이 없는 것 같아요.” 이정희(가명ㆍ56ㆍ서울 거주)씨는 “동네 모임에서 만나는 다른 주부들은 자제력이 강해서 남편 흉을 안 본다고 생각하던데, 저는 흉볼게 없어서 안 보는 것”이라며 웃었다.

‘삼식이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바깥 활동을 늘리는 것도 좋다. 김 소장은 “은퇴 후엔 남자와 여자 모두 지위와 환경의 변화를 겪으며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고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기 쉬운데, 이때 집에만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친구를 만나거나 여가 활동 등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에너지를 외부로 표출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오희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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