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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범죄는 없다] 독거노인 집서 6만원 훔치다 2년 만에 ‘덜미’

입력
2018.03.27 04:40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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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신없는 살인사건 의심

유학 전 인사 드리겠다며 들른 손자

“할머니가 사라졌다” 경찰에 신고

집안 곳곳에 핏자국과 은폐 흔적

인근서 타다 만 피해자 슬리퍼 발견

# 유력한 용의자도 풀려나

할머니 노트 속 무자격 치과 치료사

진술과 다른 행적ㆍ말 바꾸기 추궁

뒤늦게 “불륜 감추려고 거짓말…”

차량 혈흔도 가족 생리혈로 판명

# 미궁 2년 만에 꼬리 밟혀

독거 할머니집 침입 강도 동일수법

슬리퍼에 묻은 DNA 비교서 ‘일치’

“지나가다 도와달래서 운반했을 뿐”

발뺌하다 “유흥비 마련하려” 자백

윤 할머니 살해 사건 당일 범인 행적. 강준구 기자
윤 할머니 살해 사건 당일 범인 행적. 강준구 기자

“빨리 좀 와 주세요. 할머니가 사라졌어요.”

2012년 2월 19일, 김모(당시 17)씨는 6년 전 그날의 악몽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른 해외 유학을 앞두고, 충남 아산시 용화동에 살던 할머니 윤모(당시 71)씨를 찾았다 목격하게 된 충격의 단편들. 반갑게 맞아주리라 믿었던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고, 집 앞 곳곳엔 핏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아산경찰서로 신고 전화를 거는 그의 손은 통화 내내 사시나무 떨듯 요동을 쳤다.

김씨는 “할머니가 어딘가 살아 계실 것”이라고 울먹였지만, 현장에 나온 경찰 중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수없이 봐왔던 살인 사건 현장들을 떠올리면서 무책임하고 가능성 없는 희망을 함부로 얘기할 순 없었다. 루미놀(luminol·혈흔채취에 쓰이는 시약)이 집 안 여기저기로 뿌려졌다. 마당과 기둥, 툇마루에서 다량의 비산 혈흔(흩뿌려진 핏자국)이 나왔다. 대문에서 인근 야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2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도 윤 할머니 것으로 보이는 혈흔이 검출됐다. 누군가 흉기로 할머니를 살해한 뒤 시신을 차량에 싣기 위해 옮겼을 거란 생각이 경찰 머릿속에 퍼뜩 들었다.

때아닌 소동에 동네 이웃이 한둘씩 모여 들었다. “어딘가 살아 있겠지,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길을 잃었을지 모르니 꼭 찾아달라”는 부탁과 하소연이 경찰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젊은 시절 남편을 잃고 네 자녀를 홀로 키우다시피 했는데, 그 뒤론 집 근처에 살던 88세 치매 노모를 보살폈어요. 세상에 그런 효녀가 어디 있겠어요.” 일단 경찰은 ‘타살이 의심되는 실종’으로 기록에 남기며, 수사에 돌입했다. 모든 정황은 살인이라 했지만,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단정할 수는 없었다.

실마리는 좀체 풀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이틀 전인 17일 우리 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했어요. 그러곤 오후 8시 정도 됐나. ‘드라마 봐야 한다’고 집으로 가더라고요”라고 이웃이 증언했다. 그게 윤 할머니의 마지막 행적이었다. 하필 할머니가 살던 곳은 인근 야산에 공동묘지가 만들어질 정도로 한적한 시골마을. 마을 전체 어디에서도 목격자는 물론이고 눈여겨볼 만한 폐쇄회로(CC)TV 화면 하나 나오지 않았다.

집 장롱에서 발견된 노트에 미약하나마 단서가 있었다. 할머니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특별한 날의 기억을 또박또박 일기로 적어두거나, 때론 시로 기록해놓았다. “원한이나 금전관계가 있을지 몰라.” 수사팀은 ‘할머니 노트’에 등장한 인물과 사건들을 면밀히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무자격으로 몇 달 전까지 치과 치료를 해준 이모(55)씨와 다섯 살 아래 친동생에 대한 원망 섞인 글이 눈에 들어왔다. “수백만 원 들여 치료를 받았는데, 나아지긴커녕 부작용만 생겼다”는 이씨, “술만 마셨다 하면 전화해서 험한 말을 해가며 속을 썩였다”는 동생. 경찰은 두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려두고 사건과의 연관성을 따져보기로 했다.

이씨가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다. 사건 예상시간(17일 밤~19일 오전) 거주지인 아산 온양읍에 머문 사실이 확인된 동생과 달리, 이씨는 경찰에 거짓으로 알리바이를 댔다. “대전 집에 있었다”고 말했지만, 기지국 분석으로 휴대폰 사용 지역을 조사해보니 그는 18일 아산시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들통날 게 뻔한 거짓말을 왜 한 거지?” 이씨 차량을 압수해 루미놀 검사를 해보니, 마침 뒷좌석에서 미세한 혈흔이 검출됐다. 이씨는 거짓말탐지기 조사도 통과하지 못했다. 대전에 있다고 이씨가 말할 때마다 탐지기는 ‘거짓’이라고 반응했다.

하지만 이씨는 범인이 아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조사 결과 차량에서 발견된 혈흔은 윤 할머니와 무관한 가족 생리혈이었다. “대체 왜 계속 거짓말을 한 겁니까?” 경찰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는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며 털어놨다. “누구에게도, 특히 가족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은 사생활 때문이었습니다.” 불륜이었다. 은밀한 사생활을 감추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수사팀에는 허탈한 결론이었다.

증거물 조사도 더뎠다. 밤낮 가리지 않은 수색 끝에 사건 접수 일주일 만인 26일, 할머니 집에서 차량으로 15분 거리에 있는 송악면 온양천 근처 공터에서 불에 타다만 피해자의 옷과 오른쪽 슬리퍼를 발견했다. 여기서 피의자 것으로 추정되는 DNA가 발견됐지만, 감정 결과 DNA 주인이 누군지 알 수는 없었다. 할머니에게 치과 치료를 해준 이씨가 무면허 영업을 했다는 사실, 한 달 넘게 경찰이 거둔 성과물은 그게 다였다.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어갔다.

수사를 맡았던 아산경찰서 강력2팀 이현 경위는 “‘실종사건’으로 추가 수사를 계속 진행했지만 수사팀 내에서는 다들 시신을 찾지 못했을 뿐 살인사건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며 “이렇다 할 단서가 없다고 마냥 손을 놓고 포기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고 했다. 할머니 가족과 협의해 목격자를 찾으려고 ‘실종자를 찾는다’는 제목의 현수막 수십 장을 제작해 아산시내 곳곳에 붙였다. 다른 경찰서와 공조에도 나섰다. 유사 사건 피의자들의 DNA 정보를 받아와 할머니 슬리퍼에서 발견된 DNA와 일일이 대조해 나갔다. 그렇게 해를 넘겼지만, 단서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사건 발생 1년 9개월 정도가 지난 2013년 11월. 사건 해결 단초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왔다. 아산시 남동에서 혼자 살던 할머니 김모씨 집에 흉기를 들고 침입해 현금 6만원을 빼앗은 혐의(특수강도)로 석모(40)씨가 붙잡혔다. 9일 오전 6시쯤 석씨는 김씨 집에 흉기를 들고 침입해 돈을 요구했다. 김씨는 1만원권 지폐 6장을 손에 쥐어 주면서 “어려울 때 가끔 찾아 와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하고, “대신 이렇게 살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타일렀다고 한다. 석씨는 흉기를 거두고 김씨가 내민 6만원을 주머니에 급히 집어넣고는 발길을 집 밖으로 돌렸다. 물론 이웃 중 누군가 그 장면을 지켜보고 경찰에 신고할 거라는 사실은 몰랐다.

경찰에 붙잡힌 석씨가 심상치 않았다. “당연히 특수강도 혐의로 구속이 됐죠. 그런데 검찰에 송치를 하면서 DNA를 채취해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습니다.“ 피해자 김씨와 1년 전부터 수사를 하고 있던 윤 할머니가 왠지 겹쳐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해 12월 10일 국과수로부터 받은 감정 결과 보고서에는 ‘슬리퍼에서 발견된 DNA와 일치한다’고 적혀 있었다. 마침내 수사에 숨통이 트였다.

보강 수사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석씨 이동 경로를 따져보고, 통화 내역을 뒤졌다. 시신을 싣고 이동했을 차량도 압수해 꼼꼼히 들여다봤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저물었고, 2014년 1월 8일 석씨가 아산시 좌부동 집에서 강도살인과 사체은닉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마침 김씨에 대한 특수강도 혐의로 1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풀려난 석씨가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자백을 받는 일이 남았다. 석씨는 처음부터 “모르는 사건”이라며 딱 잡아뗐다. 하지만 수사팀에게는 이미 확보해둔 단서가 많았다. DNA 감정 결과를 들이대고, 거짓말탐지기 조사까지 하겠다고 하자, 석씨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윤씨 살해를) 돕기만 했어요.” 석씨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죽인 건 아니다’였다. “2012년 2월 18일 새벽 승용차를 타고 그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불쑥 차를 가로막고는 ‘물건 나르는 걸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때 함께 날랐던 물체가 그 할머니 시신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죽인 게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경찰은 단호했다. 살인 유력 용의자가 ‘모르는 일’이라고 하다가 ‘죽인 건 다른 사람이고 난 가담만 한 것’이라고 말을 바꾸는 건, 형량을 낮추려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런 진술을 하면서 스스로도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이 역력했어요.” 경찰의 집요한 추궁에 석씨는 결국 무너졌다.

석씨는 “유흥업소에 갈 돈이 필요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지인과 아산시내 노래주점에서 전날부터 사건 당일 새벽까지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음주운전 단속을 피할 요량에 농로로 차를 끌고 가던 길. 그때 대문이 열린 윤 할머니 집이 눈에 띄었다.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해고당한 뒤로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그는 돈이 궁했다. 윤 할머니 집을 약 200m 지나친 곳에 승용차를 세워놓고, 트렁크에 있던 흉기를 재킷 안쪽 주머니에 집어 넣은 채 열려 있는 대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 후 인기척에 마당으로 나와 저항하던 할머니 가슴 등을 4차례 찔렀다. 정작 돈이 있었을 방 안에는 들어가보지도 않았다. 석씨는 마당과 툇마루 등에 흐르거나 번진 혈흔을 가루비누와 수건 등으로 급히 닦고, 농업용 대형 비닐로 시신을 돌돌 말아 차량에 실었다. 2.5㎞를 달린 뒤 법곡동 소재 낚시터(지금은 폐쇄) 옆 간이화장실 정화조로 시신을 밀어 넣었다.

1심 재판부는 “1년11개월간 자신의 범행을 숨긴 채 살아왔고, 범행 후 다시 독거노인(김씨) 집에 들어가 위협하고 현금을 빼앗았다”라며 “뿐만 아니라 거짓 증언과 진술 번복 등으로 수사에 혼란을 줬다”고 판시했다. 징역 25년, 2년을 감춰왔던 범죄의 대가였다. 윤씨 주검을 마주한 자녀들은 “돌아가신 날짜도 모르고, 시신을 못 찾아 제사도 못 지냈다”며 경찰의 끈질긴 수사로 시신이라도 찾게 돼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산=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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