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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언어에 빠졌어요” 제2의 공용어 ‘수어(수화)’ 배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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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언어에 빠졌어요” 제2의 공용어 ‘수어(수화)’ 배우는 사람들

입력
2018.02.2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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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8일 경기 수원시 ‘경기도수어교육원’의 언어 수업. 여타 수업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언어 수업인데도 고요한 강의실에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손등과 얼굴을 부딪히는 소리, 옷자락 스치는 소리만 가득하다. 강사의 몸짓과 표정은 칠판에 적힌 이론에 따라 쉴새 없이 바뀌고 학생들은 그의 풍부한 언어를 따라 하느라 바쁘다. 소리가 없기에 서로 표정과 눈빛, 몸짓에 집중한다.

지난달 8일 경기도수어교육원 초급반 수업에서 학생들이 수어를 배우고 있다. 고가혜 인턴기자
지난달 8일 경기도수어교육원 초급반 수업에서 학생들이 수어를 배우고 있다. 고가혜 인턴기자

침묵 속에 간간이 웃음이 터질 때도 있다. 마침 ‘왜’와 ‘지각’이라는 단어를 배울 차례. 강사가 몸짓으로 두 단어를 표현하며, 그 날 지각을 한 학생을 콕 집자 학생들이 와르르 웃는다. 수업이 끝나고 강사가 ‘숙제 꼭 해오라’는 뜻으로 두 새끼 손가락을 세로로 얽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고개를 갸웃할 이 모습은 우리나라 제 2의 공용어 ‘수어’를 배우는 교실 풍경이다.

최근 수어를 배우는 사람이 늘고 있다. 수어는 청각장애인의 모국어이자 ‘수화’를 포함해 말하기, 읽기 쓰기 등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2016년 8월 ‘한국수화언어법’에 의해 우리나라 공용어로서 국어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 받았다. 2009년 개설된 서울시수화전문교육원에 따르면 지난해 수어 강좌를 수강한 사람은 7,300명에 달하며 이는 2016년과 비교해 1,000여명이나 증가한 수치다. 지난해 11월 공식 수어교육기관으로 새롭게 개설된 경기도수어교육원도 지난달 첫 정규 강의를 시작하며 141명의 수강생을 맞이했다. 한국일보가 지난달 4일과 8일 경기도수어교육원에서 수어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봤다.

지난달 8일 경기도수어교육원 초급반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수어를 배우고 있다. 고가혜 인턴기자
지난달 8일 경기도수어교육원 초급반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수어를 배우고 있다. 고가혜 인턴기자

수어, 왜 배우냐구요?

나이와 사는 곳이 다양한 학생들은 수어를 접한 계기도 모두 다르다. 수강 2주차 대학생 김예린(23)씨는 “신문기사로 수어를 접하고 보건 관련 전공을 살려 봉사를 할 수 있을까 해서 수업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소규모 화장품 사업을 하고 있는 김민주(53)씨는 “회사에 입사한 청각장애인 직원들과 자유롭게 대화하고 싶어서 수어를 배운다”며 “남편은 ‘굳이 배울 필요까지 있느냐’고도 하지만 또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 자체가 즐겁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직원들을 위해 통역을 해줄 수 있다면 그 또한 보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어를 전공하는 대학생 김진영(22)씨는 “수어로 청각장애인들과 대화해 그들의 어려움을 알고 훗날 장애인정책국에서 실질적인 정책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수어의 매력에 빠지다

학생들은 “수어 자체가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김예린씨는 “서로의 표정과 몸짓으로 소통하는 언어라 상대방의 시선에 집중하며 대화에 온전히 몰입하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학생 때 청각장애인 친구들의 대화를 인상 깊게 보고 최근 수어를 시작한 수강 1년차 임선아(46)씨도 “가끔 사람들과 있다 보면 관심 없는 대화 주제와 목소리에 지칠 때가 있다”며 “수어는 시선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내가 정말 원할 때, 상대방과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고 우리만 아는 비밀 암호를 나누는 기분도 느낄 수 있다”고 시각언어로서의 매력을 꼽았다. 고교 수어동아리 시절의 즐거움을 되살려 다시 배우고 있는 수강 1년차 전순옥(52)씨는 “수어는 굉장히 직접적인 언어”라며 “단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에두르는 것 없이 의미를 전달하는 게 매력”이라고 말했다.

“편견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사람들은 흔히 수어를 만국에서 통하는 언어로 알고 있다. 하지만 수어는 국가마다 표현과 체계가 다르다. 수어를 배우면서 편견을 없앤 수강생들도 적잖다. ‘한국농아대학생연합회’에서 활동한 김진영(21)씨는 “수어를 배우며 청각장애인들을 직접 만나보니 들을 수 있는 정도가 모두 다르고 입 모양을 읽고 대화하는 ‘구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며 “장애 정도와 발음, 구사 언어가 다양하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수어 중에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일일이 손짓으로 번역한 '지화’가 있다. 임선아씨는 이런 지화의 사용이 청각장애인들에겐 오히려 불편할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고 했다. 수어는 한글과 어순이 다른 별개의 언어이지만, ‘지화’는 청각장애인들이 비장애인의 언어를 다시 배우는 것을 강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수화배우는 만화'의 작가 핑크복어(필명)는 수어를 배우며 느끼는 감상과 주변사람들의 반응을 만화로 담았다. 핑크복어 제공
'수화배우는 만화'의 작가 핑크복어(필명)는 수어를 배우며 느끼는 감상과 주변사람들의 반응을 만화로 담았다. 핑크복어 제공

주위 반응은 격려 반, 의문 반

수강생들은 영어나 일본어 등 외국어를 배운다고 말할 때와 달리 격려와 의문이 뒤섞인 반응을 접한다고 전했다. 김진영씨는 “’배워서 어디에 써먹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청각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인 것 같다”며 “그들과 대화해보면 특별히 다를 것이 없고 수어로 더 깊은 대화, 다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찾아보면 청각장애인들과의 축제나 ‘AUD(에이유디사회적협동조합) 캠페인’ 등 청각장애인을 만날 기회가 많다”며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경기 안산시에서 수어를 배우며 ‘수화배우는 만화’를 연재 중인 작가 핑크복어(필명)는 “수어를 특별한 대화 수단이 아니라 그저 많은 언어 중 하나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며 “수어를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언어로 받아들일 때 수어 뿐만 아니라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영 인턴기자

고가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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