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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은] 최백호 “’고래사냥’ 듣고 자극 받아 ‘영일만 친구’ 써”

입력
2017.05.1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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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호는 목소리의 개성을 가수의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판소리처럼 구수하고 호탕한 목소리가 매력인 송창식은 최백호의 음악적 스승이나 다름 없다. 인넥스트렌드 제공
최백호는 목소리의 개성을 가수의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판소리처럼 구수하고 호탕한 목소리가 매력인 송창식은 최백호의 음악적 스승이나 다름 없다. 인넥스트렌드 제공

1975년 스물넷의 난 부산의 한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데뷔 전 일이다. 희망이 없었다.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대학 진학을 포기했고, 결핵으로 의병 제대를 한 뒤 실의에 빠졌다. 췌장암으로 투병하던 어머니 치료비로 집 전세 계약금을 다 썼고, 부산에 홀로 내려와 업소에서 월급을 받으며 살았다. 음악에 대한 사명? 그때는 몰랐다. 화가를 꿈꾸던 내게 음악은 ‘빵 굽는 타자기’ 같은 밥벌이 수단이었다.

여느 때처럼 업소에 나가 노래를 부르던 어느 날, 스피커에서 흘러 나온 한 곡이 내 인생을 흔들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DJ에 물어보니 송창식 형의 ‘고래사냥’이라고 했다.

처음 듣자마자 ‘이거 뭐지?’ 싶었다.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구수하면서도 시원한 창법에 먼저 놀랐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란 반복되는 가사에 설렜다. 업소에서 일하며 답답하고 어디로 훅 떠나고 싶던 차에 내게 온 ‘탈출 열차’를 만난 기분이었다고 할까. 어머니 돌아가신 뒤 충격으로 한동안 입을 닫았다. 군대에서도 말을 잘 안 했고, 결핵에 걸린 뒤엔 군의관에 ‘오래 못 산다’는 말까지 들어 절망 속에서 살았다. 친한 후배 가수인 주현미도 날 처음 봤을 때 너무 무서웠다고 하더라. 그렇게 어두웠던 내가 ‘고래사냥’을 들으면 피식 웃곤 했던 것 같다. 워낙 감동이 커 집에서 셀 수 없이 듣고 또 들었다. 그땐 정품 LP가 귀했고, 비쌌다. 돈이 없어 불법 복제판인 ‘백판’으로 ‘고래사냥’이 실린 영화 ‘바보들의 행진’ OST LP를 샀다.

백판에는 가사지가 없다. 듣기를 반복하며 가사를 종이에 옮겨 적어 노래를 외웠다. 그리고 나선 업소에 가 ‘고래사냥’을 불렀다.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고래사냥’ 가사는 일흔을 앞둔 지금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난다. 내 노래보다 선명하게. 노래방에서도 자주 부른다. ‘18번’이라고나 할까. 나 뿐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많은 사람이 ‘고래사냥’을 원했다. 군사정권에 억압돼 커진 자유에 대한 갈증이 ‘고래사냥’ 열풍을 만들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고래사냥’이 내게 숨겨진 역마살(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운)을 자극해 더 각별했던 것 같다. 실제로 난 정착을 잘 못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내 노래 ‘영일만 친구’는 ‘고래사냥’ 같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 만들었다. 가사도 ‘돛을 높이 올리자 거친 바다를, 달려라 영일만 친구야’지 않나.

목소리가 문제였다. (송)창식이 형 목소리가 주는 그 자유로운 느낌이 내 노래에선 안 묻어나는 거다. 청춘의 방황과 일탈을 통한 자유를 노래하고 싶어 ‘영일만 친구’를 만들었지만, 정작 내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어 한 동안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영일만 친구’의 맛을 내가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이 컸다.

그만큼 창식이 형의 창법은 독보적이었다. 누군가가 ‘최백호는 송창식의 음악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는데,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창식이 형은 나뿐 아니라 가수 강산에, 장기하 등 후배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창식이 형은 한국적인 노랫말과 창법의 큰 기둥이었다. ‘왜 불러’ 들어봐라. 창식이 형 아니면 누구도 못 부른다. 창식이 형의 ‘사랑이야’도 정말 좋아한다.

창식이 형의 노래는 따라 부르기도 어렵다. 창식이 형은 클래식을 전공해 발성이 좋은데다, 음감도 뛰어나다. 밖으로 비쳐지는 털털한 모습과 달리 성격은 꼼꼼하다. 언젠가 내가 KBS1 ‘가요무대’에서 창식이 형 ‘고래사냥’을 불렀더니, 그걸 듣고는 “박자를 왜 네 마음대로 이리 끌고 저리 끄냐”며 한 소리를 했다. 박자를 내 마음대로 잡고 노래를 하는 편인데, 그걸 창식이 형이 못 참은 거다. 이런 변칙적인 박자 운용 때문에 난 어디 가서 립싱크를 못한다. 부를 때마다 박자가 바뀌어 원곡 속 흐름이랑 무대에 섰을 때 내 입모양이랑 많이 다르니까.

창식이 형이랑은 공연도 같이 한 적이 있는데, 기회가 되면 듀엣 곡을 만들어 부르고 싶다. 그런데 창식이 형이 답을 안 준다. 장사익씨랑 셋이 하는 공연도 생각해봤는데, 재미있을 것 같다. 세 사람 느낌이 비슷하니까.

사람들은 내 가수 생활이 ‘낭만에 대하여’(1994)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40대 넘어 중년이 되니 나이에 맞는 노래를 불러야 더 깊은 맛을 우려낼 수 있다는 걸 절감했다. 젊어선 나이에 맞지 않는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이십 대 중반이던 내가 ‘영일만 친구’를 불렀으니, 곡이 주는 낭만과 여유가 제대로 전달됐겠나.

1977년 1집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내 MBC에서 신인상을 받았지만, ‘영일만 친구’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1980년대에는 하루에 일곱 군데의 유흥업소를 돌며 노래를 한 탓에 지쳐 미국으로 떠났다. 타향살이하며 외로움도 느끼고 고생한 뒤 귀국해서인지 그때야 다른 사람의 삶이 눈에 보이더라. 그때 만든 노래가 ‘낭만에 대하여’고, 그 이후 나와 같이 늙어가는 사람들의 노래를 꾸준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그랬다. 어릴 때 내 사주를 보고 와선 ‘넌 말년에 좋다더라’고. 맞는 말 같다.

새로운 목표가 있다면, 삶을 정리하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 미국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가 낸 ‘마이 웨이’ 같은 곡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좋은 노래가 마음만 먹는다고 해서 나오는 건 아니지만 내 인생에 또 한 번의 운을 기대해본다.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새 앨범 ‘불혹’을 냈다.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 등을 돌며 공연을 바쁘게 이어오다 보니 체력이 많이 소진돼 대상포진에 걸려 고생 중이다. 대구와 성남 등에 공연이 남아 힘을 내야 한다. 컨디션이 좀 안 좋았는데, 창식이 형 얘기도 하고 그러니 좀 기운이 돋는다. 가는 길에 창식이 형에게 전화나 해야겠다.

<최백호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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