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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누가 이 아이들의 가족이 돼 줄까” 보육원의 슬픈 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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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누가 이 아이들의 가족이 돼 줄까” 보육원의 슬픈 성년

입력
2018.03.1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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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을 나서는 장민주(가명)양. 김주성 기자 poem@hankookilbo.com
보육원을 나서는 장민주(가명)양. 김주성 기자 poem@hankookilbo.com

만물이 화신(花信)을 기다리는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구 A보육원에선 서글픈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날 이후 보육원을 떠나 홀로 사회의 찬바람과 맞서게 될 이곳 열아홉 살 다섯 아이의 퇴소식에서다. 보육원 관계자는 “아이들이 어찌나 울던지 퇴소식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국내 아동양육시설(일명 보육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의 문턱에 서면 원칙상 더는 머물 수가 없다. 또래 친구들이 새 학기로 들뜬 3월이 오기 전 이들이 보육원을 떠나야 하는 이유이다. 누구보다 차가운 봄을 앞두고 두려움에 떠는 열아홉 살들. 고교를 졸업했지만 이들 다섯 중 한 명만 일자리를 구했을 뿐이고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는 없다. 사회의 가장 낮은 출발선 앞에서 새봄 슬픈 성년식을 치르는 보육원 퇴소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A보육원을 떠나는 열아홉 동갑내기 단짝 서윤정(가명)양과 강지나(가명)양은 일곱 살 때 처음 만났다.“저는 어디서든 적응을 잘하는 편이었는데, 얘는 맨날 울었어요.” 꼬맹이 시절 각자의 사연을 담은 채 다른 보육원에서 지내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A보육원으로 보내진 이후 12년을 붙어 지낸 지나양을 윤정양이 짓궂게 놀린다.

퇴소식을 마치고 서울의 한 여성 자립생활관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이들에게 보육원 선생님들은 쌀, 반찬, 이불, 라면 등을 꼼꼼히 챙겨줬다. “윤정이와 지나는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 채 살아왔어요. 이렇게 아이들을 사회로 내보내는 상황이 어찌 보면 내팽개치는 것 같아 가슴 아픕니다.” 이삿짐을 옮긴 보육원 관계자들도 지난 12년 동안 친부모 대신 자신들을 가족으로 여기며 살아온 아이들을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며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이제 누가 이 아이들의 가족이 되어줄까. 광야에 홀로 서는 아이들 앞에 봄바람은 서늘하기만 했다.

“한 달에 50만원만 쓰고 살 거예요”

이제 자립이다. 25세까지 집세를 낼 필요 없는 이곳 자립생활관에서 살 수 있지만, 가능한 많은 돈을 모아 그 전에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윤정과 지나는 일반고를 나왔고, 각각 컴퓨터와 제빵분야 직업훈련을 받았지만 취업을 못 했다. 윤정양은 컴퓨터 분야가 적성에 맞지 않고, 지나양은 외식 분야 근무 환경이 너무 열악해 고민이다. 결국 지나는 첫 직장을 포기한다고 했다. “학원에서 소개해 준 어묵 전문점에 가보니, 주말에는 혼자 주방 업무를 다 하는 거였어요. 도저히 안될 것 같아 못하겠다고 했죠.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빨리 취직해 돈을 벌 생각이에요.” 둘은 각기 면세점, 신용카드업체 콜센터 취업 면접을 앞두고 있다. “끝까지 도와주겠다”는 보육원 자립전담교사의 약속을 믿는다고 했다.

지나양은 3월부터 한 달 50만원만 쓰기로 했다. 다행히 여성 자립생활관에 들어가 집값은 들지 않으니, 아끼면 가능할 것 같다. 서울시에서 보육원 퇴소자들에게 지원하는 자립정착지원금 500만원 등은 보육원에서 관리해준다. 아직 사회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직접 관리하면 금세 다 써버리기 때문에, 보육원에서 대신 관리해 주겠다고 했다. 필요한 생활비를 이야기 하면, 보육원에서 개인 계좌로 보내주는 식이다.

지나양은 돈을 모아 내년엔 어떻게든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 졸업해 사회복지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한다. 어느 대학 등록금이 저렴한지, 장학금은 어떻게 되는지, 생계비를 벌면서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을지 궁금한 게 많았다. 하지만 윤정양의 꿈을 물어볼 기회는 없었다. 보육원 퇴소를 전후해 우울해진 윤정양은 자립생활관으로 옮긴 후 더 이상 인터뷰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일곱 살 때는 지나가 가슴앓이를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윤정양이 그런 모양이다. 지나양은 “윤정이가 쌤들(보육원 종사자들)하고 많이 친했거든요.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했다. 지난 2월 초 첫 만남에서 둘은 보육원 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사회에서 자리를 잘 잡아서, 귀여운 동생들을 자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연애도 동아리도…지금은 생각 없어요”

“장학재단에 장학금을 신청해놓았는데 일정 학점을 넘지 못하면 자격 요건을 박탈한다고 해 앞으로 공부만 해야 할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도 친구들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면 그냥 집에 간다고 이야기하곤 해 거절하는 건 익숙합니다.” 지난 2일 대학 첫 학기를 맞은 김진석(19ㆍ가명)군은 설렘보다 각오가 앞선 듯했다. 술자리와 미팅ㆍ소개팅 등 새로운 인연을 맺는 데에는 언제나 돈이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보육원을 나서면서 이를 더 악문다고 했다.

지난달 말 서울 관악구 B보육원을 퇴소한 진석군은 수도권의 모 대학 컴퓨터 관련 학과에 진학했다. 꼭 진학해 달라는 아버지의 바람, 기술을 배워 좋은 직장을 얻고 싶은 마음에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든 다른 아이들과 달리 어렵사리 대학행을 결심했다.

진석군에게 낯선 환경은 늘 두려움이자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었다. 기억조차 흐릿한 다섯 살 무렵. 어머니가 갑자기 가출한 뒤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 명의인 집에서 나와야 했다. 택시기사였던 아버지는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어 진석군을 고모댁으로 보냈다. 이곳에서 진석군은 술만 마시면 통제 불능인 사촌 형이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봐야 했다. 아홉 살 되던 해 고모마저 돌아가시자 아버지와 함께 찜질방 생활을 했다. 아버지가 야간운전을 하러 간 사이 혼자 찜질방에 남겨지면 두려움에 공중전화로 아버지에게 전화해 빨리 오라고 울먹이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게 두 달을 지낸 어느 날 아버지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이 바로 그가 10여년을 지낸 B보육원이다.

보육원 생활을 시작한 후 한참 동안 형들이 무서워 종일 이모(보육원 종사자)곁에 꼭 붙어 있곤 했던 진석군은 아직도 낯선 환경이 힘들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는 게 두렵고 성격도 소심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학창시절에 일부러 농담도 많이 하면서 극복했지만 대학에서 잘 해낼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서부터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까.” 첫 학기 등록금(380만원)은 서울시의 지원(300만원)과 후원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앞으로 장학금은 학점에 달려 있어 진석군에게 대학은 생존 분투의 현장일 수밖에 없다. 서울시의 자립정착지원금 500만원과 정부 지원 및 후원금으로 채워진 아동발달지원계좌(CDA) 600만원, 일반통장 90만원 등 1,200만원이란 잔고는 진석군의 삶의 방식을 좌우하는 숫자다. 언뜻 많아 보이지만 부모가 있는 친구에 비해 들어갈 돈은 곱절이 넘는다. 최후 생계비 300만원과 다음 학기 등록금 380만원을 제외하고 남는 돈은 500만원. 한국토지주택공사(LH) 전세자금대출로 마련한 텅 빈 빌라에 냉장고와 세탁기부터 수건, 수저, 휴지 등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넣어야 한다.

남은 200만원을 당분간 생활비로 책정했지만 몇 달을 버틸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보육원에 있을 때는 식비와 교통비가 거의 들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껴야 할 ‘비용’이 됐다. 더 중요한 건 막다른 골목에도 기댈 이가 없다는 사실.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아버지는 현재 고시원에서 홀로 지내고 있다. 진석군은 “아버지는 대학을 가도 지원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이미 이야기했다”라며 “현재 신청한 장학재단 쪽에서 생활비까지 대준다고 해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어 집 근처 어디든 자리를 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살기 어렵지 않을까요?”

겉보기에는 여느 청소년과 다르지 않은, 밝은 성격의 장민주(19ㆍ가명)양. 하지만 “다른 친구가 패딩을 입고 나가서”라며 외투를 제대로 챙겨입지 않은 채 너무 오래 입어 짧아진 청바지 차림으로 인터뷰 자리에 나온 모습은 그늘로 어두웠다. 그는 서울의 B보육원에서 16년을 살았다. 올해 특성화고 관광경영과를 졸업했고, 최근 보육원을 나와 자립생활관으로 옮겼다.

‘집(보육원)’에서는 다양한 사건과 사람들이 있었다. 함께 입소했던 친오빠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보육원에서도 떠났다. 어떤 언니는 다른 사람들의 옷가지와 물건 등을 훔쳐서 보육원을 나가기도 했다. 베이비박스에 뉘어져 들어와 원장 선생님의 성을 딴 아기들도 20여명이나 있었다. 보육원 아이들은 학교에서 부모님 이름을 써낼 때, 원장 이름을 아버지나 어머니 이름 칸에 쓰는데 그때 성이 다르면 아이들이 위축되기 때문에 원장의 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보육원에서 가장 오래 있었던 민주양은 곧은 심지를 잃지 않으려 늘 자신을 다잡았다. 공부는 싫었지만 책은 열심히 읽었다. 이번에 이사할 때 대부분의 짐은 책일 정도였다. 초등학교 때 뮤지컬 ‘브레멘 음악대’에 푹 빠져 이후 기회가 닿으면 공연과 전시를 부지런히 보러 다녔다. ‘텃새와 군기 잡기가 싫어서’ 고등학교에서는 스스로 봉사 동아리를 따로 만들기도 했다. 야무졌던 민주양도 3월부터 사회인으로서 불안한 첫발을 디뎠다. 고등학교 때 잠깐 인턴십을 했던 컨설팅 회사에서 3개월간 인턴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정규직인 줄 알았는데 인턴인 데다 주어진 업무가 생소해 기간이 종료되면 이후에 어떻게 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민주양은 지지고 볶고 화해하는 일반 가정의 환경을 몰라, 자신을 돌봐 준 후원자 부부를 오해한 적이 있다. 일종의 성장통이었다. 약 12년간 자신을 보살펴 준 부부와 중학교 3학년 때 말다툼을 하고 연락을 끊었던 것. 자녀가 없던 부부는 민주양이 세 살 때부터 후원자가 돼 주말마다 민주양을 데리고 놀러 갔고 필요한 물품을 사 줬다. 민주양은 후원자 부부를 자연스럽게 ‘엄마’, ‘아빠’라고 불렀다.

후원자의 집에 발길을 끊은 계기는 사소한 말다툼이었다.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계속 보려던 민주양과 이를 말리는 후원자간 실랑이가 벌어졌다. 후원자는 민주양이 말을 듣지 않자 ‘태도가 그게 뭐냐, 너희 시설에서 그렇게 가르쳤냐’라며 화를 내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당시에는 아빠의 그런 행동에 깜짝 놀라고 화도 났어요. 그런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보육원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회복지사 이모들은 나에게 화가 난다고 해서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거나 하지는 않잖아요. 나중에 친구들이 부모님과 그런 식으로 많이 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이해가 됐어요.” 민주양은 지난 설을 앞두고 3년여 만에 이들과 연락이 닿아 오해를 풀었다고 했다.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디딘 그에게 ‘미래’는 너무 추상적이고 멀다. 한국에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친구와 함께 외국으로 나가 소믈리에로 일할 계획을 그려보기도 한다. 결혼할 생각도 없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는 60세에 은퇴를 하려면 매달 300만원을 모아야 한대요. 안정된 노후 같은 건 잘 모르겠고, 언젠가 독립해 나만의 집에서 고양이와 둘이 살고 싶어요.”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박소영 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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