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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삭감이 능사일까, 국정원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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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삭감이 능사일까, 국정원을 위한 변명

입력
2017.12.0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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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데 돈 쓴 원장들 때문에

정작 일선서 공작비는 늘 모자라

자주 욕먹다 보니 보신주의 만연

원장 통제 시스템 구축이 바람직”

올 7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서울고등법원에서 대선 개입 의혹 사건 파기환송심 결심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올 7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서울고등법원에서 대선 개입 의혹 사건 파기환송심 결심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근 국가정보원은 국회에서 특수활동비 680억 원이 삭감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에 따라 내년도 국정원 특활비가 올해보다 19%나 줄었다. 특히 ‘청와대 상납’에 쓰인 특수공작비는 반 토막이 됐다. 국정원 예산은 사실상 전부가 특활비다. 국정원이 제출한 예산안에 국회가 손 대는 게 드문 일이지만 국정원은 감수하는 눈치다.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심산에서다.

그런데 예산을 줄이는 것만이 능사일까. 물론 책임은 국정원에 있다. 무엇보다 국가안보라는 정보기관으로서의 본령을 망각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한희원 동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일 “대북 정보 수집이든 해외 방첩 공작이든 목표부터 명확히 세우고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는 게 순서인데도 예산부터 왕창 확보한 뒤 뭘 해야 할지 몰랐던 게 이번 사달의 근본 배경”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돈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쓰도록 유도하는 게 통제의 본래 목적”이라고 조언했다.

사실 돈을 엉뚱한 곳에 쓴 건 정권의 안보에 충성한 일부 국정원장이다. 하지만 욕은 국정원 전체가 먹었다. 함께 매도되고 있지만 어쩌면 일선에서 뛰는 요원들도 피해자인지 모른다. 모자란 공작비를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직 국정원 고위 관계자와 얘기를 나눴다.

_군 정보기관 관계자에게서 정보도 돈을 주고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결국 자금력이 정보력이라는 설명이었다.

“맞는 얘기다. 대인 정보 활동을 할 때 돈을 주고 정보를 수집해달라고 의뢰하는 경우가 있다. 일종의 첩보 수집 공작인데, 핵심을 뽑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응당한 보수를 주고 정보를 수집하는 거다. 흥정이 이뤄진다. 정보원 에이전트(중개인)를 관리하면서 보수를 주고 정보를 구매하는 셈이다. 문제는 값을 치를 돈이 부족해 정보를 놓치는 일이 잦다는 사실이다. 가령 요원이 ‘좋은 친구(정보원)가 있어 정보를 입수하려 하는데 공작비로 100만원이 필요하다’고 내부에 보고하면 안에서는 그걸 깎기 일쑤다. 20만원 정도로 확 말이다. 그래서 무리한 흥정을 하다 뒤늦게 접근한 일본 정보기관 같은 곳에 정보를 가로채기 당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렇게 쓰여야 할 곳에 쓰이지 못한 공작비가 청와대로 새고 있었던 것이다.”

_이병기 전 원장 시절에는 월 1억원씩 상납됐다고 한다.

“예컨대 건당 3,000만원이라 칠 경우 1억원이면 한 달에 귀중한 첩보를 3~4건씩 확보할 수 있다. 1년이면 30건이 넘는다. 공작비로 제대로 쓰였다면 대한민국 안보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_열악한 여건에다가 걸핏하면 원장들의 일탈 탓에 싸잡혀 욕까지 먹으니 조직 사기가 엉망이겠다.

“그렇다. 일탈 사례가 부각되면서 위축되는 측면이 있다. 공작에 실패하는 상황을 예단하고 책임을 모면하려는 분위기도 생겼다. 아마 ‘이런 공작 사업을 해보려 하는데 100억~200억원이 투입된다’며 목적을 밝히고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하면 정보위원들도 분명 ‘오케이’ 할 거다. 그런데 ‘거액을 썼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쩌나’ 지레 실패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언젠가부터 조직에 커졌다. 진취성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보수적 생각이 원 내에 만연해버린 거다. 공작 사업비에 물가 상승률을 곱해 (기계적으로) 예산을 요구하는 분위기에서 무슨 획기적 공작 기획이 나오겠나. ‘훌륭한 공작 계획서를 만들어오면 책임은 내가 지겠다’며 부하 요원을 독려하는 상사를 원 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_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선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 요원들의 예산 집행 재량권을 우선 강화할 필요가 있다. 예산이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통제하면서 목적에 부합하도록 공작 사업비의 재량도 강화해야 하는 딜레마에 (국정원이) 봉착해 있다.”

‘공작비가 풍족하진 않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차마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진 못했다. 다만 국정원이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갖추려면 한국의 정치 문화와 제도가 차제에 일신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댓글 사건 등이 불거지면서 정보기관 요원들의 도덕성을 많이들 지적한다. 왜 부당한 지시에 불복하거나 저항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하지만 국정원을 만신창이로 만든 이는 역대 대통령들이다. YS(김영삼), DJ(김대중), 노무현 등 세 사람 외에는 정보기관을 국정 운영이나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다. 전문가가 아니라 자기 말 잘 듣는 사람들을 안전기획부(국정원 전신)장과 국정원장으로 보냈다. 행정부처를 대통령이 수족화하는 한국의 권위주의 정치 문화가 배경이다.”

국정원 출신이 내놓은 실효적 해법은 ‘내부 감시’ 강화다.

“대통령 뜻이 우선 중요하겠지만 어떤 대통령이 집권해도 임의로 할 수 없도록 이번 기회에 제도를 잘 구축해야 한다. 결산에 소홀한 국회 관행을 감안할 때 중요한 건 내부 통제다. 현재 국정원장 아래 감사관실이 있다. 지금껏 형식적 통제에 그친 건 감사관을 원장이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안 된다. 원장 지휘로부터 독립된 내부 감사관이 실질적으로 원장 활동을 견제하는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국가정보원 전경. 국정원 제공
국가정보원 전경. 국정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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