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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보호무역으로 성장한 선진국, 개도국엔 자유무역 요구” 이중성 비판

입력
2018.04.30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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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성ㆍ대중성 다 잡은 학자

이해하기 까다로운 경제학 원리

쉽게 전달하는 글쓰기 능력 갖춰

‘뮈르달 상’ ‘레온티에프 상’ 수상

# 경제 분석에 제도ㆍ환경 중시

‘선진국=나쁜 사마리아인’ 지칭

“성장ㆍ분배 위해 신자유주의 아닌

복지국가 정책 강구해야” 강조

# ‘포스트 신자유주의’로 이동

美ㆍ中 분쟁 등 불확실성 증가에

저성장ㆍ저소득으로 불평등 심화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미래 달려

몸 담고 있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포즈를 취한 장하준 교수. 뮈르달상을 받는 등 유력 경제학자로서 장 교수는 제도주의의 입장에서 시장, 신자유주의, 주주자본주의 등 주류 경제학에 강력한 반대의견을 제출해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몸 담고 있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포즈를 취한 장하준 교수. 뮈르달상을 받는 등 유력 경제학자로서 장 교수는 제도주의의 입장에서 시장, 신자유주의, 주주자본주의 등 주류 경제학에 강력한 반대의견을 제출해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100년 우리 지식인들의 무대를 국내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유학을 가 그 나라에 머물며 연구를 계속하거나 외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신의 학문을 일구어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학자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일본의 강상중, 미국의 신기욱, 영국의 장하준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경제학자 장하준일 것이다.

지난 100년의 지성사에서 상대적으로 젊은 지식인인 장하준을 여기서 다루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장하준은 뛰어난 경제학자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영국 캠브리지대학교로 유학을 가 석사와 박사를 마친 다음 1990년부터 캠브리지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03년 뮈르달 상과 2005년 레온티에프 상을 연거푸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부상했다.

둘째, 장하준은 시민들과의 소통이 활발한 경제학자다. 2002년 영어로 발표한 ‘사다리 걷어차기’를 위시해 그가 출간한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등은 지식사회는 물론 시민사회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그는 전문적인 경제학 원리를 분명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글쓰기 능력을 갖춘 이례적인 경제학자다. 전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성취한 사회과학자가 다름 아닌 장하준이다.

사다리를 걷어차는 선진국

장하준이라는 이름을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린 저작은 ‘사다리 걷어차기’다. 이 책에서 장하준이 주목하는 것은 오늘날 선진국이 후진국에게 강제하는 정책 및 제도가 과거 자신의 경험과는 정작 무관한, 외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장하준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경제학적 생각들에 의문을 표한다. 예를 들어, 재산권 보호가 경제발전의 전제이고, 적극적 산업정책은 결국 경제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신자유주의가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는 가정들에 대해 그는 역사적 진실을 파헤침으로써 그 통념들에 이의를 제기한다.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란 말을 처음 쓴 이는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다. 리스트는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자유무역론에 맞서 보호무역론을 주창했다. 장하준은 리스트의 말을 인용한다.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오른 사람이 그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은 다른 이들이 그 뒤를 이어 정상에 오를 수단을 빼앗아 버리는 행위로, 매우 잘 알려진 교활한 방법이다.” 미국을 위시해 오늘날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국가들은 시장주의와 자유무역이 아니라 국가개입과 보호무역을 통해 선진국이 됐고, 사다리 걷어차기를 통해 후진국과의 경제적 격차를 유지해 왔다는 게 장하준의 주장이다.

비교역사적 관점에서 장하준은 선진국에서 신흥공업국에 이르는 국가들의 산업ㆍ무역ㆍ기술정책이 경제 성장과 산업화를 가능하게 한 요인임을 주목한다. 그리고 재산권 보호 제도, 기업 지배구조 제도, 금융 제도, 사회복지와 노동 제도가 성장과 산업화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제도 발전의 역사를 추적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장하준이 전하려는 것은 1980년대 이후 광범위하게 유포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신뢰가 근거 없는 맹목적 믿음에 불과하고 경제적 성공이 아닌 실패로 귀결될 것이라는 경고다. 이 책이 출간된 지 6년 후 2008년 금융위기를 통해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한 것을 돌아보면 장하준의 통찰은 선구적이었다.

학문 발전과 시민 계몽에서 모두 탁월

‘사다리 걷어차기’ 이후 장하준은 잇달아 문제작들을 내놓았다.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할 만큼 관심이 뜨거웠다. 장하준이 말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란 선진국들을 지칭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보호무역주의를 통해 산업화에 성공했음에도 개발도상국에게는 자유무역주의를 요구하는 선진국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국내 소개된 장하준의 책들. 신자유주의 비판을 정교화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국내 소개된 장하준의 책들. 신자유주의 비판을 정교화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구성부터 흥미롭다. 그릇된 경제 이론 또는 지식을 바로 잡으려는 23가지 명제로 이뤄져 있다.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하면 안 된다’ ‘자유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 ‘자본에도 국적은 있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좋은 경제정책을 세우는 데 좋은 경제학자가 필요한 건 아니다’ 등 흥미진진한 주장을 알기 쉽고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장하준이 이러한 연구들을 통해 전달하려는 경제학적 메시지는 크게 보아 두 가지다. 경제발전을 위해 개발도상국은 자유무역 정책이 아니라 보호무역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게 하나라면, 성장과 분배를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아니라 복지국가 정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게 다른 하나다.

장하준 경제학에 대한 고평(高評)은 국내외에서 두루 이뤄졌다. ‘사다리 걷어차기’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이에게 수여하는 뮈르달 상을 안겨줬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대해 경제학자 이병천은 우리 시대 경제 시민을 위한 훌륭한 길잡이라고 칭찬했고, 경제학자 이근식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장하준 비판의 결정판이라고 평가했다. 이근식은 물론 장하준의 주장이 시장만능주의를 대신해 국가만능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음을 우려하기도 했다.

굳이 분류한다면 장하준은 제도주의 경제학자다. 제도주의 경제학은 경제를 분석하는 데 사회 제도 및 환경을 중시하는 접근을 말한다. 시장주의에 입각한 주류경제학의 시각에서는 장하준의 연구 결과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는 기본적으로 정치와 문화를 포함한 사회 안에 놓여 있고, 경제와 사회 간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장하준의 연구는 사회과학 전반에서 주목 받아 마땅하다.

장하준은 2014년 영국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가 선정한 ‘올해의 사상가 50인’ 가운데 9위에 올랐다. 그 동안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한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지만, 장하준만큼 국제적 명성을 누려온 이를 찾기는 어렵다. 경제학의 학문적 발전은 물론 시민적 계몽에서 앞으로 장하준의 더욱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는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화의 미래

2014년 출간한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장하준은 말한다. “초고속 세계화가 진행된 지난 30여년 사이 경제 성장은 둔화되었고, 불평등이 증가했으며, 대부분의 나라가 금융위기를 더 빈번히 겪어야 했다.” 바야흐로 세계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에서 ‘포스트 신자유주의’로 이동해 왔다.

이 포스트 신자유주의를 무엇보다 특징짓는 것은 불확실성이다.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의 주장처럼 신자유주의는 쉽게 사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자유주의가 금융위기 이전처럼 지구적 표준으로서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는 것도 아니다. 저성장과 저소득 경향이 두드러지는 ‘뉴노멀’ 시대가 열려온 셈이다. 이 와중에 세계경제 헤게모니를 놓고 미국과 중국 간의 경제 전쟁이 본격화됐다.

불평등 문제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문제제기는 4차산업혁명이 논의되는 21세기 경제에 더욱 긴요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불평등 문제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문제제기는 4차산업혁명이 논의되는 21세기 경제에 더욱 긴요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오늘날 세계경제의 미래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불확실성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경향들은 분명해 보인다. 첫째, 세계화는 계속 강화될 것이다. 정보사회의 진전이 비가역적인한 경제의 지구적 네트워크는 더욱 촘촘해지고 긴밀해질 것으로 보인다. 둘째, ‘AMI(Advanced Manufacturing Initiative)’ ‘인더스트리 4.0’ ‘소사이어티 5.0’으로도 불리는 제4차산업혁명이 경제를 주도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 등으로 대표되는 이 새로운 기술혁명은 중장기적으로 경제는 물론 정치ㆍ사회를 크게 뒤바꾸어 놓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이러한 미래의 진행에서 정부의 분배와 복지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않는다면 사회 불평등은 점점 증가할 것이다. 21세기가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우려처럼 세습자본주의가 더욱 공고화되는 세기가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SF 소설가 윌리엄 깁슨의 말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만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래에의 대비를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세계화, 제4차산업혁명, 불평등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우리 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이번 주 게재 예고됐던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차후 다뤄집니다. 다음주에는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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