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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연차 소진” 문재인의 적들

입력
2017.07.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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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말 취임 후 첫 연차휴가를 낸 문재인 대통령이 경남 양산 사저 마당에서 마루를 만지고 있다. 청와대 제공
5월 말 취임 후 첫 연차휴가를 낸 문재인 대통령이 경남 양산 사저 마당에서 마루를 만지고 있다. 청와대 제공

“저는 연차휴가를 다 사용할 계획입니다.”

이 땅에서 저건 말이 아니다. 몽환에 가깝다. 근 20년 노동에 절었건만 들은 적도, 한 적도 없다. 이제껏 연차휴가는 절반도 못 썼고, 유일하게 쉬는 토요일 아내가 출근하면 네 살배기 들쳐 업고 시경 기자실로 출근하곤 했다. 대체휴가는 다시 일로 대체했다. 월-월-화-수-목-금-금, 청춘은 그렇게 보람차게 흘러갔다.

2년 전 운 좋게 1년을 쉬면서 가족과 함께 미 대륙 횡단 한 달, 중남미 4주, 캐나다 20일, 버뮤다 크루즈 열흘 등 태평양 너머를 오달지게 누볐다. ‘아, 이런 게 휴가구나.’ 덕분에 아내는 사학연금이 보장되는 정규직을 잃었고, 빚더미에 올랐다. 귀국 후 방 한 칸에 세 식구가 잠든다. 톨스토이 단편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가족 베개 삼아. 몸은 누추하나 맘은 푸짐하다.

그리하여 철석같이 다짐했다. ‘내가 쉬어야 남도 쉰다. 반드시 연차휴가를 쓴다. 선배들에게 권한다. 후배들도 막지 않는다.’ 최근 “술 마시다 급사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 결심은 더 굳어졌다. 너와 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하물며 기계도 쉰다.

“저는 연차휴가를 다 사용할 계획입니다.” 대통령 입에서 나온 뒤에야 저건 말이 됐다. 어느 시인 말마따나 꽃이 되었다. ‘휴식이 국가경쟁력’ 거창한 수사가 없더라도, 휴가로 인한 경제효과가 몇 조원인지 계산기 안 두드려도 그 어떤 공약보다 전심 지지한다. 국정 마비니, 경기 위축이니 정적의 간계는 귓등으로 듣기 바란다.

진짜 적은 우리 안팎에 도사리고 있다. 부려먹을 땐 주인의식 운운하다 쉬려고만 하면 노예 인증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는 결단과 현실을 이간질한다. 법이 정한 남의 휴가에 왈가왈부하는 마름(상사나 중간간부나 선배)들 천지다. 4차 산업혁명은 세 치 혀에 달라붙어있을 뿐 머릿속은 아직 노동시간을 맹신하는 농경사회에 물들어 있으니 서슴없이 말한다. 대략 이렇다.

“언제 가지 말랬어?” “가라” 해놓고 눈치는 왜 주나. 여기저기 뒤에서 험담한 게 돌고 돌아 다 들린다. 차라리 앞에서 떳떳하게 말하라.

“역사의 현장에 있는데 가고 싶나.” 명작 전쟁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윈터스 중위는 세계대전 중에도 휴가 간다. 책 읽고 커피 마시고 목욕도 한다. 전쟁의 참상을 성찰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휴식도 역사다.

“옆 팀 바쁜 거 안 보여.” 그런 식이면 아무도 못 간다. 오히려 옆 팀이 바쁘니 갈 수 있는 거다. 혼자만 회사를 위한다 여기지 마라. 누구나 수없이 고민하고 휴가 계획을 짠다.

“일도 못(안) 하면서.” 업무능력은 정식 평가시스템으로 판단하라. 휴가를 막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되레 핑계거리만 안긴다.

“누가 대신 해?” 평소 누가 대신 해줄 수 없을 만큼 업무 과다에 시달렸다는 얘기니 그건 회사에 따지기 바란다. 시스템 미비와 인력 부족은 회사 책임이고, 그에 대한 건의는 일차적으로 상사 몫이다. 간언하기 어렵다면 상부상조하는 차선을 마련하라.

“나도 힘들다.” 평소에 말씀하라. 경청할 준비는 돼있다. 휴가 떠나는 남까지 힘들게 할 필요는 없다. 본인이 있어야 회사(조직)가 굴러간다는 집착은 털어내고 잠시 쉬라. 그게 모두에게 이롭다.

“우리 때는 안 그랬다.” 안 그래서 어떤 장점이 있었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다면 부디 하지 말라. 근로자 약 절반은 직장 내 분위기 탓에 여전히 연차휴가를 쓰지 못한단다. 이젠 바뀔 때도 됐다.

연말쯤 문재인 대통령이 연차휴가 소진 대국민 보고를 했으면 한다. 써보면 알 게다. 휴가 계획은 연초에 짜야 하며, 최소 2주는 연속 쓰게 해줘야 하고, 최고 리더가 아무리 권해도 중간에서 눈치 주면 말짱 도루묵이란 사실을. 연차휴가라는 게 없는 비정규직 처지도 살펴주길. 그래서 이 땅 누구든 당당히 외치게 하자.

“저는 연차휴가를 다 사용할 계획입니다.”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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