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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복직…쓰레기더미 사무실 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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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복직…쓰레기더미 사무실 발령”

입력
2016.06.2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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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합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자음과모음 출판사 직원 윤정기씨가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음과모음은 지난해 말 직원인 윤정기씨가 소속된 계열사를 외주업체로 변경하고 폐사무실이나 다름 없는 사업장으로 발령 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29일 합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자음과모음 출판사 직원 윤정기씨가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음과모음은 지난해 말 직원인 윤정기씨가 소속된 계열사를 외주업체로 변경하고 폐사무실이나 다름 없는 사업장으로 발령 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지난해 3월 출판사 자음과모음은 젊은 편집자 윤정기(30)씨를 물류창고로 전보했다. 2014년 9월 사무실에 CCTV를 설치하려는 사장에게 문제제기를 한 후 눈 밖에 난 윤씨는 이듬해 권고사직을 받았고 이를 거부하자 물류창고로 발령 난 것이다. 부당 전보라 여긴 윤씨는 회사의 부당인사, 근로계약서 미작성 등 불법 사례들을 모아 외부에 폭로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회사의 발령이 불법임을 인정했고 정기씨는 그 해 7월 복직했다. 국내 출판노동의 열악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복직은 말뿐이었다. 회사는 정기씨에게 편집 업무를 맡기지 않았고 교정업무만 간간히 시키다가 올 초부터는 그마저도 끊어 버렸다. 사무실만 지키길 6개월째, 회사는 23일 마포구 도화동의 사업장으로 정기씨를 발령 냈다. 책상 위에 수북한 먼지와 쓰레기, 늘어져 떨어지기 직전인 벽지, 사실상 업무공간이 아니었다. 함께 일하는 상사는 “어떻게 해야 널 죽여버릴까 싶다” “싫으면 그만두든가” 등의 폭언을 뱉었다. 29일 합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윤정기씨는 지쳐 보였다. 지난해 7월 복직 때만 해도 “회사가 싫다고 해서 퇴사해버리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하던 그였다. 정기씨는 “이제 개선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도화동 사무실 발령은 불법이 아닌가.

“주식회사 자음과모음(이하 주자모)에 계열사가 여럿 있는데 나는 그 중 문학ㆍ인문서를 출간하는 이룸 소속이었다. 회사가 지난해 말 이룸의 상호를 ‘더이룸’으로 바꾸면서 법적으로 주자모와 관련 없는 회사가 됐다. 정은영 대표는 하청업체라는 표현을 썼는데, 실제로 업무를 맡긴 적은 없고 다만 내 위치가 외주 교정자처럼 됐다. 이것 때문에 불법이라고 하기 애매한 상황이 됐다. 단순히 상호를 바꾼 게 아니라 사실상 이룸을 없애고 나를 주자모와 무관한 회사에 소속시킨 것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려고 해도 갈 곳이 없는 상황이다.”

-발령 계기가 있었나. 최근 임금체불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지난달 말 회사측이 적자를 이유로 전 사원에게 3개월 간 매월 50%의 급여만 지급하고 지급일을 5일에서 20일로 바꾸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이달 초 회사게시판에 급여일을 임의로 바꾼 것을 지적하고 체불예정 임금에 대한 구체적인 변제 계획을 제시하라는 글을 올렸다. 여기에 대해 회사가 보복성 발령을 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로선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

-다른 직원들 중 항의한 사람은 없나.

“디자이너 한 명이 나갔을 뿐, 공식적으로 항의글을 올린 사람은 없다. 댓글로 의견을 달라고 했는데 아무 글도 달리지 않았다. 우스운 건, 나는 그때 이미 ‘더이룸’ 소속으로 외주자 입장이라 월급을 제대로 받고 있었다. 정작 월급이 깎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내가 나서서 계속 항의하는 것도 뭐해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윤정기씨가 일하는 도화동 사무실. 벽지가 뜯기고 먼지와 쓰레기가 쌓여 있어 업무가 힘든 환경이다. 전국언론노조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제공
윤정기씨가 일하는 도화동 사무실. 벽지가 뜯기고 먼지와 쓰레기가 쌓여 있어 업무가 힘든 환경이다. 전국언론노조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제공

-도화동 사무실 상황은 어떤가. 함께 일하는 상사는 누구인가.

“한 마디로 업무가 불가능한 곳이다. 통풍도 안 되고 에어컨도 없어 한여름엔 견디기가 힘들다. 같이 일하는 사람은 더이룸의 경영이사인 문모씨다. 주자모 직원은 아니었고 출판사 외부 업무를 도와준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편집자로 있을 때 회사에 종종 들렀는데 ‘더이룸’으로 상호가 바뀌면서 갑자기 경영이사 자리에 앉았다. 금연건물에서 계속 담배를 피우고 항의하면 욕설을 퍼붓는다. 호칭도 “야” “이 새끼”다. 아침에 출근해서 앉아 있으면 계속 감시한다. 아예 자리가 내 쪽으로 돌려져 있다.”

-법적 대응이 애매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사측은 퇴사를 종용하는 것 같다. 출판노조와 상의하고 있지만 복귀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주말마다 광화문에서 노조와 함께 시위하고 있다.”

-열악한 출판노동환경에 대해 한 마디 해달라.

“지난해 3월 물류창고로 부당전보 당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빨리 나와 다른 데서 실력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실력이 있으면 아무도 무시 못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이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있으면 맞서야 하는데 외면하고 무시 못할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다. 출판계는 법보다 실력이 위에 있다. 그러니 노동문화 자체가 안 만들어진다. 법도 허점이 많다.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최소한의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집단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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