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6.21 12:53
수정 : 2015.06.22 19:25

[이재현의 유행어사전] 썸

등록 : 2015.06.21 12:53
수정 : 2015.06.2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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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썸타다’는 말은 오늘날 젊은 남녀의 교제 풍습에서 정식으로 사귀기 전에 대개 짧게는 2~3주, 길게는 한 달 안팎에 걸쳐서 감정적으로 교류하면서 탐색하는 과정이나 상태를 표현할 때 쓰인다.썸타는 게 과거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이가 일상적으로 썸탈 수 있게 된 것은 SNS의 보급 덕분이다. 1990년대에 야타족이 되려면 외제차가 있어야만 했지만 지금 썸타려면 스마트폰만 있으면 된다. 삶의 기예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달 수 있는 연애의 선행 단계가 정보 기술의 확장에 힘입어 미묘하게 세분화되고 자립한 결과로 나타나서 유행하고 있는 것이다.

썸탄다는 것은 연예 기획사의 관용 표현인 ‘정식으로 사귀는 것은 아니고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둘은 상당히 다른데 연예인들의 경우 겉으로는 서로 알아간다고 하지만 나중에 보면 실제로 깊게 사귀고 있던 경우가 많으며 보통 사람의 경우 썸타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흔히 ‘밀당’이라고 부르는 계산 내지는 흥정이다.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은 연애의 가장 중요한 계기가 ‘결정화’라고 했는데, 바닷물에서 소금이라는 결정체가 만들어지는 현상에 연애 감정을 비유한 것이다. 1970년대 중반 미국의 심리학자는 실상 이 ‘결정화’라는 게 성적 이끌림을 에둘러서 표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정서적 결정화가 이뤄지면 상대방의 하찮은 것도 멋있게 보이고 결점은 전혀 눈에 뜨이지 않는다.

반면에 썸탄다는 것은 정식으로 사귀는 데서 생기는 갖가지 부담을 미리 예측해보고 그것을 최소화하려는 데에서 나온 풍습이다. 원룸 생활이 보편적으로 된 오늘날 젊은 남녀가 자거나 동거하는 것이 예전보다는 엄청 쉬워졌다. 그런 만큼, 상대를 잘 골라야 할 필요성도 커졌다. 무언가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조사, 비교, 연구하는 일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썸타는 것의 장점은 맞선이나 소개팅, 혹은 부킹과는 달리 제3자가 필요하지 않으며 친구나 동료나 지인, 혹은 우연히 만난 사람 중에서 아무나 골라서 그이를 썸남 혹은 썸녀로 상정할 수는 있다는 점이다. 전화번호를 알거나 따낼 수만 있다면, 일단 초기에는 돈이 거의 안드는 데다가 어느 누구와도 설레임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민주적이고 경제적인, 연애 감정의 장치인 것이다.

그런데 비틀스 노래 ‘썸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가사가 ‘아이 돈 노우’라는 점이 드러내듯이, 과연 그 사람이 썸남썸녀인지 알기가 어렵고, 또 썸타는 일의 시작과 끝이 알쏭달쏭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진행 자체가 흐지부지한 경우가 많다. 또 스노보드나 파도를 타는 것보다 썸탄다는 것은 매우 더 부담스러운데 그것은 결국 살아 있고 감정이 있는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상대방 역시 계산과 흥정을 하고 있고 이쪽을 애태우게 만들려는 약아빠진 주체이기에 일정하게 감정과 시간을 소모해야만 하는 게임인 것이다.

썸타는 풍습을 이용해서, 일방적으로만 연락을 해댄다거나 돈 문제에서만 칼 같이 남녀평등을 요구한다거나 스킨십 및 섹스 등에서 할 건 다 하자고 덤비는 못된 남자들도 없지 않다. 반면에 삼포세대 청년들은 돈이 없어 정식으로 연애를 하지는 못하고 썸만 타는 안타까운 경우도 많다. 그런가 하면, 남녀 모두 실연, 이별 등에서의 비용, 상처, 환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썸만 타고 말거나 아니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사람과 썸을 타는 경우도 있다.

썸타는 풍습을 계산과 흥정에 초점을 맞추어서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또 기성세대들 중 일부는 연애나 사랑에 과감히 몸을 던지기보다는 썸타는 일에 몰두하는 젊은 세대를 비겁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계산하는 주체’의 등장은 소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문화연구자들은 설명한다. 연애나 섹스, 그리고 결혼 및 이혼의 모든 과정 자체가 계산과 흥정의 대상이 된 지는 꽤나 오래 되었다. 오히려, 썸타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게 주로 젊은 남녀들만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게임이라는 점에 있다. 중년 및 노년도 쉽고 편하고 안전하게 썸탈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이재현의 유행어사전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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