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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 못 먹으면 결혼도 못한다”는 편견

입력
2017.04.0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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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비롯한 다양한 ‘○싫모’ 가 등장하고 있다. 페이스북 캡쳐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비롯한 다양한 ‘○싫모’ 가 등장하고 있다. 페이스북 캡쳐

“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에 오이소박이가 반찬으로 나왔는데 선생님께서 다 먹지 않으면 급식실에서 내보내주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억지로 코를 막고 물과 함께 씹어 삼키다 구토를 하게 됐는데 선생님은 계속 끝까지 먹으라더군요. 그 날 이후로 오이를 보기만 하면 구역질이 나옵니다.”(‘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페이지 익명제보)

“어른들과의 식사 중에 버섯이 나오면 몰래 골라냅니다. 하지만 꼭 들켜서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편식이냐’고 꾸중을 듣습니다. 그래서 요즘엔 버섯을 먹는 척 한 뒤에, 몰래 화장실에 가서 뱉고 옵니다.”(‘버섯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운영자 이준호(20)씨),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경험했거나 목격했을 장면이다. 이렇게 특별하지도, 또는 새롭지도 않은 불편을 다시금 돌아보자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특정 음식을 싫어하는 모임’들이다. 지난달 27일 사회관계형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오싫모)’페이지가 생긴 이후로 ‘당근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당싫모)’, ‘버섯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버싫모)’, ‘가지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가싫모)’등이 줄지어 등장하고 있다. 각 페이지엔 적게는 수 천명에서, 많게는 약 9만명에 달하는 이들이 몰리고 있다.

“‘오자이크(오이+모자이크)’해주세요” 뒤에 숨겨진 진지함

가싫모ㆍ브싫모ㆍ당싫모 등에 올라온 유머 게시물. 페이스북 캡쳐
가싫모ㆍ브싫모ㆍ당싫모 등에 올라온 유머 게시물. 페이스북 캡쳐

각 페이지에는 자신이 먹기 싫어하는 음식에 대한 재기발랄한 유머가 넘친다. ‘브로콜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페이지에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생 브로콜리 사진이 올라오자 “보기 힘드네요 ‘브자이크(브로콜리+모자이크)’해주세요”라는 요청이 줄을 잇는다. 오싫모에서는 ‘오이’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기 위해 OE 등으로 표시하기도 한다. 당근 모양을 한 필통은 ‘당싫모’에겐 ‘식욕감퇴필통’일 뿐이며, 모 뷔페에서 제공하는 가지 요리를 보고 ‘가싫모’ 회원들은 “식욕을 떨어뜨려서 음식을 많이 못 먹게 하려는 전형적인 뷔페의 상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각 페이지에 올라오는 사연들은 심각하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강요로 억지로 음식을 먹다 토한 정도는 기본이다. ‘오싫모’에 사연을 보낸 한 남성은 “저희 가족은 제가 오이를 못 먹는 게 ‘찌질’하고 그런 남자는 결혼도 못 할거라고 말한다”며 “‘홍어나 생굴을 못 먹는 사람도 있는데 오이가 어떠냐’라고 반박하면 오이를 못 먹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따진다”고 하소연했다. ‘당싫모’ 운영자 윤이정(20)씨는 “여자친구가 당근을 왜 안 먹냐고 하길래 억지로 씹다가 바로 뱉어버렸다”며 “저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여자친구의 눈빛과 그 때 느낀 창피함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먹기 싫은 것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폭력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먹기 싫은 것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라는 것이다. ‘버싫모’ 페이지 운영자인 이준호(20)씨는 “사람들은 자기가 먹는 음식을 남이 안 먹는 걸 보고 ‘편식’이라 규정하지만 사실 누구나 싫어하는 음식 하나쯤은 있지 않나”라며 “누구나 싫은건 당당하게 안 먹는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싫모’ 운영자인 김대한(24)씨 역시 “입맛을 제외하고도 우리가 살아온 생활방식이 다른데 그걸 틀린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가지를 못 먹는 사람들이 주눅들지 않길 바란다”덧붙였다.

‘○싫모’페이지는 이들에게 용기를 준다. 오이나 당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뿐만 아니었다는, 브로콜리나 버섯을 안 먹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오싫모 운영자인 H씨는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좋아요를 누른 건 처음’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목소리를 내주길 바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 역시 “가지를 먹지 못해서 놀림 받은 경험을 말하며 서로 위로하는 것이 ‘가싫모’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도 이들을 향한 편견은 여전하다. 각 페이지 운영자들은 ‘나는 오이가 좋은데 너는 왜 싫냐’, ‘당근을 싫어하는 네가 싫다’라는 식의 반대 메시지를 하루에도 수 차례 받고 있다. 싫어하는 음식의 사진만 골라 메시지를 보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씨는 “버섯이 왜 싫냐고 지적하는 메시지를 받으면 ‘웩’이라고 답장하며 웃어넘긴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지하게 볼 수 밖에 없는 메시지도 있다. H씨는 ‘(오싫모)관리자님 귀엽네요’라는 메시지를 많이 받는다며 “못 먹는 걸 강요하지 말라는 의도를 ‘편식하려는 어리광쟁이들’이라고 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싫모’ 관리자 H씨는 자신이 받은 반대 메시지를 페이지에 공개했다. 메시지에 있던 오이미역냉국 등의 음식은 회원들을 위해 직접 가렸다고 한다. 페이스북 캡쳐
‘오싫모’ 관리자 H씨는 자신이 받은 반대 메시지를 페이지에 공개했다. 메시지에 있던 오이미역냉국 등의 음식은 회원들을 위해 직접 가렸다고 한다. 페이스북 캡쳐

표준만 강요하는 사회를 향한 ‘웃긴’ 저항

“오이는 하나의 예시일 뿐입니다.” 오싫모 운영자 H씨는 말한다. 그는“오이먹기를 강요하는 상황을 확장시키면 대학교 사발식, 조직 내 군기 등 싫어하는 것을 강요하는 사회분위기와 맞닿아있다”며 “음식을 떠나서 획일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계속 문제제기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의 표현방식이 ‘재미’일 뿐, 그 문제의식만큼은 가볍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온라인 상의 ‘싫어요’ 페이지가 가벼운 모임으로 보일지 몰라도 같은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을 한데 묶고 치유하는 기능을 톡톡히 할 것”이라며 “나아가 이들의 모임이 동질성을 강요하는 사회적 관행을 거부하는 일종의 저항운동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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