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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화원 곰배령…초록 바람 눈부시다

입력
2017.05.2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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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화원’에 꽃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온 산을 화려하게 장식할 만큼 뒤덮지는 않았다. 박새 벌깨덩굴 단풍취 졸방제비꽃 풀솜대 산괴불주머니 홀아비바람꽃…. 계절에 맞춰 수없이 많은 들꽃들이 피고지고 있었지만, 신록의 눈부심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여행객들이 곰배령 정상의 표지석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인제=최흥수기자
여행객들이 곰배령 정상의 표지석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인제=최흥수기자

“꽃구경이 목적이면 꽃 축제에 가면 훨씬 낫지 않을까요?” 곰배령에 가기 전 야생화 개화상태를 문의했을 때 점봉산생태관리센터에서 돌아온 대답이다. 미리 말하면 봄 꽃은 지났고, 여름 꽃은 이르다. 꽃구경이 목적인 이들에게 곰배령은 지금이 가장 어중간한 시기다. 그럼에도 600명으로 제한된 하루 입산 인원이 일찌감치 마감되는 이유는 가본 사람만 알 수 있다.

곰배령이 위치한 강원 인제군 기린면 진동2리는 서울 강남구보다 넓지만 120여 가구에 주민은 200여명이 전부다. 면소재지 현리에서 30km나 떨어져 있고 방태천을 따라 양양군 서림마을까지 연결된 418번 지방도(조침령로)를 1시간 가까이 거슬러 올라야 하는 곳이다. 계곡 양편으로 산은 점점 높아지고 계곡은 더욱 깊어지는데, 정상 부근은 오히려 경사가 완만하고 부드럽다. 곰배령(1,164m)이라는 지명도 산세가 곰이 하늘로 배를 드러내고 누운 형상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행정구역상 진동2리로 묶었지만, 일대에는 살둔 올둔 달둔, 연가리 적가리 아침가리 명지가리 등의 지명이 남아 있어 ‘삼둔오갈’이라고도 부른다. 지역 방언으로 ‘둔’은 고원지대의 평평한 땅을 가리키고, ‘가리’는 계곡 속 제법 넓은 터를 뜻한다. 그래서 정감록에 난을 피할 수 있는 살기 좋은 곳이라고 썼다지만, 그럴듯하게 꾸며낸 말이다. 실상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곰배령은 백두대간 줄기로 중요한 군사 통로였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전란을 피해가지 못했다. ‘설피밭지수네’ 펜션 창틀에는 파랗게 녹슨 탄환이 장식돼 있다. 펜션 주인장 김철한씨에 따르면 1970년도까지 밭갈이를 하다 보면 군화 철모 총알 등이 무더기로 발견되곤 했단다.

’설피밭’은 땔나무를 뜻하는 ‘섶나무밭’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설피밭’은 땔나무를 뜻하는 ‘섶나무밭’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곰배령 한 펜션에 한국전쟁 때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탄환이 장식돼 있다.
곰배령 한 펜션에 한국전쟁 때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탄환이 장식돼 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400여 가구의 화전민들이 골짜기마다 밭을 일구고 살았지만, 전쟁 이후에는 대부분 월북하고 빈 마을이 되었다. 마을 바로 아래가 38선이다. 이후 1950년대 후반 농사를 짓고 살면 땅을 주겠다는 유인책으로 다시 사람이 거주하게 됐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현재 120여 가구 중 당시부터 살아온 ‘원주민’은 5가구에 불과하다. 곰배령 귀촌 1세대인 김씨가 이주한 2001년만 해도 산골 중에 산골이었지만, 다큐멘터리 ‘곰배령 사람들(2009)’, 드라마 ‘천상의 화원 곰배령(2011)’ 등이 방송을 타면서 이주민들이 지금도 꾸준히 늘고 있는 중이다. 곰배령의 이국적 풍광까지 주목 받으면서 관광객의 발길도 여전하다.

지금은 등산로로 이용하고 있지만 곰배령은 인근 단목령과 함께 산간마을을 연결하는 주요 고갯길이었다. 기린면 진동리에서 인제읍 귀둔리를 오가며 동해의 어물과 산골의 곡식을 교환하던 상인들에게도 중요한 교역로였다. 그 길을 따라 지게꾼(지게를 벗었다 다시 메는 것이 번거로워 지게 작대기에 의지해 서서 쉬어 쉬었다고 해서 ‘선질꾼’이라 불렀다)과 말몰이 상인들을 위한 주막이 2곳이나 있을 정도였다.

곰배령에 오르기 전 마지막 동네인 강선마을까지는 순탄한 평지길이다.
곰배령에 오르기 전 마지막 동네인 강선마을까지는 순탄한 평지길이다.
열목어가 거슬러 오른다는 계곡과 나란히 걷는 길이다.
열목어가 거슬러 오른다는 계곡과 나란히 걷는 길이다.

점봉산생태관리센터가 위치한 설피밭마을에서 곰배령 정상까지는 약 5km로 만만찮은 거리지만, 그리 험한 길은 아니다. 관리센터에서 강선마을까지 약 2km 구간은 오르막이 거의 없는 비포장 흙 길이다. 시작부터 잎 넓은 나무들이 짙은 그늘을 드리워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막아준다. 왼편으로는 열목어가 거슬러 오르는 계곡이 이어져 청량함을 더한다.

강선마을을 지나면 그제야 본격적으로 등산로다. 가파르지 않고 완만한 산길이다. 설악산 바로 옆이지만, 산세는 지리산 둘레길처럼 푸근하다. 커다란 광주리 모양의 양치식물인 관중이 넉넉한 그늘 아래 퍼져있어 원시림의 기운을 느끼게 하지만, 화전민들이 땔나무를 하던 곳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리 오래된 숲은 아니다. 곰배령 입구 설피밭마을은 눈이 많아 한겨울에는 설피가 없으면 다닐 수 없다는 데에서 유래했다고들 믿고 있지만 김철한씨의 설명은 좀 달랐다. 땔나무를 통틀어 일컫는 섶나무에서 유래했고, 옛 지명도 ‘섶나무밭’을 뜻하는 신전(薪田) 이었단다.

광주리 모양의 관중이 원시림의 느낌을 준다.
광주리 모양의 관중이 원시림의 느낌을 준다.
휴대폰 파노라마 카메라 기능으로 찍은 곰배령 정상. 목재 통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휴대폰 파노라마 카메라 기능으로 찍은 곰배령 정상. 목재 통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산 정상은 이제야 초록이 눈부시다.
산 정상은 이제야 초록이 눈부시다.
곰배령에서 보이는 설악산 대청봉과 중청봉.
곰배령에서 보이는 설악산 대청봉과 중청봉.
곰배령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여행객들.
곰배령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여행객들.

고개 정상을 코앞에 둔 마지막 10여분이 그나마 힘든 구간이다. 이곳부터는 나뭇잎의 색도 다르다. 산 아래는 녹음이 짙어가는 초여름이지만, 곰배령은 이제야 온통 초록이다. 햇살에 반짝이는 투명한 신록이 푸른 하늘보다 눈부시다. 동으로는 설악산 대청봉과 중청봉 뒷자락이 가파른 자태를 드러내고, 맞은편 아래는 인제읍 귀둔리다. 이곳으로도 곧 등산로가 열릴 예정이란다. 고개 정상은 경사가 더욱 완만한 초원이다. 산정에서 흔치 않은 이국적인 풍광이다. 주변의 키 작은 나무들이 스멀스멀 초지를 침범하고 있어, 자연상태로 둔다면 이곳도 머지않아 숲으로 뒤덮일 듯하다.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바람은 바로 옆 사람의 탄성도 날려버릴 만큼 거셌다. 정상에 도착하면 대부분 ‘천상의 화원 곰배령’ 표지석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바쁘지만, 이내 곰배령의 바람과 햇살에 하염없이 몸을 맡긴다. 스르르 눈감으면 꽃이 없어도 천상(天上)이다. 나무 탐방로를 벗어날 수 없는 점이 못내 아쉽다.

▦곰배령에 가려면

●점봉산 곰배령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인터넷 예약과 진동리 펜션 이용객 각 300명으로 입산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인터넷 예약은 산림청 홈페이지(www.forest.go.kr)의 휴양ㆍ문화ㆍ복지>산림산촌생태>산림생태탐방 항목에서 할 수 있다. 진동리의 펜션을 이용할 경우 미리 등산 계획을 말하면 예약을 대신해 준다. ●길이 가파르지 않지만 왕복 10km가 넘는 거리여서 4시간은 잡아야 한다. 제한 시간인 오후 4시 이전에 하산하려면 오전 11시 이전에 생태관리센터를 통과해야 한다. 신분증 지참 필수. ●서울에서 곰배령에 이르는 길은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IC~인제~현리~조침령로를 이용해 3시간이 넘게 걸린다. 6월 서울양양고속도로가 완전 개통을 앞두고 있어 양양군 서림IC를 이용하면 2시간 정도에 닿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인제=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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